어쩌면 '오징어' 같을지라도
'오징어'라는 단어의 다른 쓰임을 하나 안다. 외모가 뛰어난 사람을 본 직후,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 그 간극으로 후자를 '오징어'에 비유하는 쓰임을. 개인적으로 쓰지도 않는 표현일뿐더러, 딱히 공감하는 표현도 아니었는데 쓰임이 떠오르던 날이 있었다.
지난 주말 '장류진'작가의 단편소설 '연수'를 읽었다. 수록된 소설 중 두 번째 소설인 '공모'까지 읽었을 때였다. 나는 그의 글에 빠져들었다. 문장은 매끄럽고 유려했으며, 삶의 어떤 순간들을 잡아채는 센스가 넘쳤고 가독성이 뛰어난 글은 술술 읽혔다. 그의 스토리텔링이 탄탄한 글을 읽으며, 두 번째 단편 소설 '공모'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느낌으로 알았다. 얼마간 나의 글을 읽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을. 나의 글이 '오징어'로 보일 정도로 간극의 낙차가 아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잠시 쓸 의욕을 상실했다.
몇 가지의 생각이 떠올랐다. 글을 쓰는 일을 누가 알아줄까 싶다가도,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빼어난 글은 누군가의 눈에 띌 수밖에 없겠구나, 그 빼어남이 숨겨지지 않아 숨길수가 없겠구나 싶어 왠지 모를 안도감과, 다른 하나의 생각은 가끔 마음속으로 해왔던 누군가의 글이나 글 쓰는 공간과 나의 공간을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이런 마음이었다. 글 쓰는 자체를 사랑하고, 잘 쓰고 싶어서, 사랑받는 글을 쓰고 싶어서 쓸 뿐인데 비교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함께 격려하고 응원하며 나아짐을 위해 노력하며 배우고 함께 글을 써나가는 것이 현명한 태도 아닐까. 나아지고 성장해 점점 더 아름답고 유려한 글을 쓰는 것이 종래에 지향하는 바라면.
혼자 그렇게 마음속 파도의 정체를 감지하며 책을 읽던 나는 '연수'의 마지막 단편소설인 '미라와 라라'에서 조금 뭉클했다.
-"소설 같은 거, 아무도 안 봐요."(중략)"어차피 우리밖에 안 봐요. 여기서 한 발짝만 나가면, 아무도 소설 따위 관심 없다고요."(중략)"나도 알아."조금 뜸을 들인 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도 나한테는 이게 제일 귀하고 중요해. 너처럼."-장류진 '미라와 라라'
아무도 관심 없지만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글을 쓰는 일. 당연하지만 소설 속 그 부분은 장류진 작가의 숨길 수 없는 진심 같았고,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글'의 세계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모호하고 아찔하며 잡히지 않고 잡을 수도 없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할지 생각하자 뭉클하고 그게 너무 귀하게 느껴졌다.
때로는 훌륭하고 유려하다 여겨지는 글 앞에서, 나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글이 부족하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고 그럼에도 멈추거나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는 거였다. 나한테는 그것이 귀하고 중요하면 그것만으로도 쓸 이유는 충분하니깐. 그렇게 써진 글이 사랑받지 않거나, 많이 읽히지 않는다 해도 써진 후의 글의 운명까지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니깐.
쓸쓸하지만 '아무도 안 본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묘하게 안심이 되었던 이유는, 그렇기 때문에 또 솔직하게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나처럼 현미경을 들고 들여다보지 않는 나의 글 이므로 적어도 나는 솔직하게 그곳에 마음껏 나를 풀어나갈 수 있는 거니깐.
언제나 많은 이유로 글을 쓰지만, 오늘의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