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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an 10. 2024

한국에서 함께 오는 것들

'나'를 만나는 시간

 비가 온다. 합법적으로 달리기를 쉰다. 덕분에 쓰지 않은 에너지를, 날씨를 핑계 삼아 가라앉아버린 텐션을 올리는데 쓴다. 텐션을 끌어올리는 일은 실패할지 모르지만, 그 덕분에 갈 곳 없이 감당이 안 되는 마음을 이번에는 글로 푼다. 오늘의 글은 길 잃은 마음을 위해 쓰는 글이다. 

 잠시 한국을 다녀오면, 다시 이곳의 일상으로 돌아오는데 소모되는 에너지가 상당하다. 특히 급작스러운 한국 방문 말고, '한국 방문' 자체가 목적인 한국행 일수록 후유증이 있다. 

 '주변인(周邊人, 어느 집단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 나는 자주 '주변인' 같다. 다른 이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지, 다들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말고는 온전히 내가 속해 있구나 나의 자리구나 라는 느낌을 받는 곳이 사실상 거의 없다. 정확하게는 '직계 가족', 친구들 모임의 '베프집단'을 제외한 자리는 그 자리에 존재함으로 채워지는 에너지보다 소모되는 에너지가 많다. 물론 그 가운데 심(心)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있고, 때로는 의무감이 동반하는 자리도 있으니 그 자리를 지키겠지만 가끔 그 시간 마음의 바닥으로 파고들어 보면 '서글픔'이 발견될 때가 많다. 각자의 이유로 삶의 서글픔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 '주변인'의 정체성에서 기인하는 서글픔이 짙다. 그 서글픔은 아마 '소외감'과 결을 함께하는 서글픔 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나만 느끼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기를 바라는 '나'의 소외감을 지우고 태연한 척 견디기 위해, 때로는 정말로 태연해지기 위해 한국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 (과하게) 에너지를 쓴다. 내 감정이 수용할 수 있는 능력치보다, 감정이 크게 소모되는 시간을 보낸다. 마음이 붕 떠 있는 느낌에 차분하게 상황을 살필 틈도 없다. 눈앞에 아이가 있어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1:1 관계일 때와 달라 온전히 아이에게 마음이 잘 이입되지도 않는다. 낯선 느낌. 그렇게 나는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갈 날이 되어 다시 일본으로 오는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 한국행으로 인해 충전되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적으로 소모된 상태로 일본으로 돌아와 다시 일상으로 온전히 돌아오기까지 마음이 뜬 상태로 지낸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글을 쓰다 보니 조금 정리가 된다. 한국에서 함께 오는 것 중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살짝 정신상태가 붕 떠 있는 나 자신'인 것이다.  

 보이는 것도 함께 온다. 한국에서 함께 오는 보이지 않는 것은 '서글픈 것'인 반면 보이는 것은 명확하다. 보이는 것은 '행복한 기운을 주는 것'을 가져온다. 두 가지는 의식적으로도 마음을 써서 챙겨 온다. 하나는 엄마의 반찬(꽈리고추 볶음과 들기름 깻잎 조림 등)이고, 두 번째는 종이책이다. 엄마의 반찬은 맛도 맛이지만, 힐링 푸드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세관(稅關)에서 반입 제한되는 것들을 피해서 이곳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조금 가져와 냉동실에 얼려두고 가끔 꺼내먹는다. 다 먹을 즈음은 다시 한국에 갈 날이 되어 있어, 의도한 건 아니지만 거의 맥이 끊기지 않고 있다. 종이책의 경우 '읽는 맛'을 위해 가져온다. 전자책을 가지고 있지만, 전자책은 눈으로 보기에는 진짜 종이책을 똑같이 구현할 정도로 잘 만들어졌지만 역시 나에게 '책'이라 하면 종이책이다. 읽고 싶은 리스트들을 적어놨다가 한국에 가면 무게제한을 고려해 몇 권만 들고 와서 아껴 읽는다.

옷장 한구석의 위로가 되는 공간.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보이는 것들에 기대 보이지 않는 서글픔을 이겨낸다. 엄마의 반찬을 조금 꺼내먹고, 마음이 공허하면 가져온 책을 꺼내 읽으며 가라앉아 가는 감정을 추스르고 나만 아는 서글픈 어느 시간들을 이겨낸다. 사실 원래 내 마음속에 늘 그 기질이 있었지만, 한국 방문으로 더욱 촉발된 '보이지 않는 서글픔' 들을 '보이는 것'에 기대 털어 내다보면 어느새 내가 머물던 일상으로 다시 스며들어 있다. 

 물론, 당연하게도 일상으로 돌아온 뒤 그 후는 다르지 않다. 발생 과정이 다르니 그 성질만 다를 뿐 일상에서 찾아오는 서글픔과 아픔과 우울함과 슬픔, 공허는 여지없이 이어져 그것들과 대면하는 날이 다시 이어진다. 어쩔 수 없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또 그때그때 동원할 수 있는 것으로 이겨내는 수밖에. 나는 그렇게 나의 어려움들을 지나가며, 나와 친해진다. 덕분에 내 삶에서만은 내가 '주변인'이 아닌 존재로 남는다.

덧. 쓰다 보니 알아진다. 보이지 않는 서글픔을 털어내는 또 하나의 방법은 '글'임을. 글을 쓴 뒤 나는 쓰기 전의 나보다 대체로 나아진다. (이것 또한 100% 확실한 방법이 아니라 '대체로'를 덧붙일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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