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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Feb 16. 2024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은 아픔에 관하여

 작년 11월 나보다 한 살 많은 사촌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심장마비였다. 오빠는 직장 동료의 권유로 동료와 그가 속한 산악회 사람들과 갑자기 등산을 가게 되었고, 11월의 그날 이례적으로 평소보다 유달리 추웠으며, 오빠가 갔던 산은 초보자에게 험한 산이었다. 간신히 산에 오른 오빠는 하산 중에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쓰러지는 순간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예상된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오빠에게 달라붙어 오빠의 가슴이 새카맣게 변할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멈추지 않았다. 강풍에 구조헬기는 착륙조차 할 수 없어 두 시간 동안 현장 주변을 돌다가 마침내 오빠를 병원으로 이송했고, 예상했듯 병원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모든 악조건이 겹친 그날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고, 이모는 저녁에 그 사실을 전달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모는 그 와중에 다른 친척들까지 잠 못 자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심장이 내려앉는 오빠의 비보를 이튿날 아침 모두에게 전하고 빈소를 열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오빠의 물건들과 떠난 오빠의 자리를 정리하는 일(관공서, 금융기관, 통신사, 구독 서비스 등등)도 끝났고, 이제는 언제 끝날지 모를 현재 진행 중인 아픔만 남아있다. 

 이 글의 제목을 쓰며 고민했다. '매듭짓지 못하는' 아픔이라고 쓰면 이 슬픔이 영영 끝날 수 없어서 막막할까 봐, 오빠를 잊지 않되 언젠가는 아픈 마음이 매듭지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아직)'매듭지어지지 않은'이라고 제목을 바꿨다. 

 나의 입장에서 이 슬픔을 바라보면 떠난 오빠로 인한 슬픔은 조금 무뎌졌다. 그럼에도 이 아픔이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남겨진 분들의 슬픔의 관함 때문이다. 매일 무뎌지지 않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오빠의 가족들, 특히 오빠인 엄마의 이모에 관한 마음이 나를 붙잡고 있다. 

  그 아픔의 시간을 복기하며 이 글을 써보는 이유는, 글을 쓰며 설명할 수 없는 엉킨 마음의 실타래가 조금이나마 풀리고,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복잡함이 조금은 정리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말하기 어려운 이 마음을 내보내고 싶어 써본다. 말하고, 쓰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쓰기 전보다는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풀어본다.  

 그날 오빠에게 등산을 가자고 했던 오빠의 직장 동료는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 했고, 이모는 그분을 붙잡았다. 오빠의 생명이 사그라져가는 모든 순간에 있었던 그분이 평생 의도치 않았던 일로 빚어진 죄책감을 벗어나지 못할까 봐 그만두지 말아 달라고, 다른 곳에 가서도 계속 그 마음을 안고 살까 봐, 그곳에서 함께하며 상처를 치유받기를 바라셨다. 무엇이 정답일지는 모르지만 이모는 그 상황에서 그분을 걱정했다. 그분이 오빠에게 등산을 권했던 이유가 선한 의도였음을 잘 알고 계셨기에, 그분에 대해 조금의 원망조차 품지 않으셨다. 

 이모는 오빠를 애도하기에는 턱없는 공식적인 기간이 끝나자, 지속적으로 슬퍼하는 본인의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부담이 되고 지속적인 슬픔을 안겨줄까 봐, 그 아픔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내하려 사력을 다하고 계시고, 나는 그런 이모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슬프다. 사실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음을 알기에 막막함과 안타까움이 엉킨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이모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리려고 지속적으로 안부를 전하는 일뿐인데, 이 끝을 알 수 없는 위로의 마음을 글로나마 정리해보고 싶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그래도 이제 이만큼 살았으니, 겪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여긴 시간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긴 시간이. 그것은 턱없이 부족한 경험에서 빚어진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던가. 나는 틀렸다. 완전히 틀렸다. 살아도, 살아도, 살며 끝없는 경험과 연륜이 쌓이고 온 세상의 모든 지혜가 쌓여도 끝내 알 수 없을 일은 거대한 슬픔을 극복하는 일 아닐까. 그럼에도, 남은 날을 생각하면 끝내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없다고 결코 결론짓고 싶지 않다. 끝내 그 마음에 굴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직도 지혜가 부족한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어쩌면 끝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이모가 어제보다는 오늘 한순간이라도 마음이 편해지는 순간이 늘어나고, 내일은 오늘보다 한순간이라도 덜 아픈 시간들이 늘어나고.. 그렇게 덜 아픈 시간이 조금씩 많아지는 방향으로 시간이 흐른다면, 언젠가는 조금 많이 덜 아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글을 쓰며 나의 마음이 나아진 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를 붙잡고 있는 이 마음에 관해 한번 써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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