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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Sep 02. 2024

삶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사랑한다’고 읽히는 일들을 알고 있다. 신뢰가 두터운 관계 간에 오가는 배려의 행위들. 그 상호 간의 일은 ‘사랑한다’의 구체적인 표현임을 알고 있다. 상대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사랑의 표현들을 안다. 

 삶을 사랑하는 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껴안는 일, 오직 자신의 삶을 사는 일, 자신의 일상에 온전히 머무는 일, 하루하루 자신의 최선으로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일. 그 이상으로 삶을 향한 사랑을 구체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가고 있다. 길고 뜨거웠던 여름의 날들을 뒤로하고, 아침저녁 부는 바람에는 어느덧 가을이 묻어 있다. 계절의 사그라듦이 명확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여름의 사라짐은 어둠이 오는 공허한 시간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둠과 함께 옅어지는 여름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조금 쓸쓸해진다.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그 쓸쓸함을 방어할 수 없다.

 어떤 강렬한 기운은 한번 안면을 트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여름의 사라짐도 그랬다. 오래전, 일본 벳부(別府)의 온천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던 때였다. 시기적으로 행복했고, 온천수 수영장에서 분수쇼를 보던 늦여름 밤은 아름다웠다. 그때, 불쑥 여름이 떠나고 있음을 알았다. 서서히 그렇지만 분명히 여름은 떠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스쳤던 마음은 상실(喪失) 이었다. 어쩌면 여름과 함께 사라질 그 순간이 아쉬웠는지 모른다. 그 후 해마다 여름의 떠남을 어김없이 감지했고, 어김없이 쓸쓸했다. 

 감사하게도 감정에는 정체(停滯)가 없었다. 수시로 널을 뛰는 감정은 자주 나를 버겁게 만들었지만, 덕분에 쓸쓸함에도 계속 머물지 않았다. 정체가 길어질 수 있어도 ‘멈춤’은 없었고, 하나의 감정이 모두 소비되면 반드시 감정의 다음 장이 찾아올 것을 알았다. 

 ‘기대(期待)’. 쓸쓸함 이후 찾아오는 감정은 ‘기대’였다. 단어 자체로 이미 설렘을 담고 있던 ‘기대’의 구체적 내용은 수시로 바뀌었지만, 여름의 끝에 찾아오는 기대는 ‘일상(日常)’을 향한 기대였다. 더위로 한동안 접혀있던 일상의 펼쳐짐을 향한 기대쓸쓸함 뒤로 언뜻 비쳤던 기대를 알았기에, 쓸쓸함 또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위가 절정으로 치닫던 때 잠시 한국에 다녀왔다. 특별한 더위 속에 보냈던 특별한 시간들. 짧았던 한국의 비 일상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때맞춰 조금씩 물러갈 채비를 갖추고 있는 더위를 보며, 여행의 마무리와 함께 한동안 접어둔 일상을 다시 펼친다.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우선, 여행의 흔적부터 제 자리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여행 가방을 정리하고, 집 구석구석의 공기를 바꿔주고, 한동안 인적이 없던 집의 적막을 지운다. 그리고 비어있는 냉장고를 동원해 간단한 집밥을 만든다. 잡곡밥을 짓고, 황태로 뽀얗게 육수를 내어 얼려둔 대파와 두부를 넣은 황탯국과 한국에서 가져온 엄마의 반찬을 곁들인 조촐하지만 따뜻한 집밥을. 이 시간, 이보다 더 적합한 요리가 있을까? 가족들과 집밥을 먹으며 삶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한동안의 부재가 확연한 일상의 밀린 일들을 차곡차곡 해나가고, 여독을 풀다 보니 어느덧 해가 넘어갈 기미가 보인다. 일상 복귀 준비를 조금 마친 우리는 이번에는 산책을 나간다. 아직 더위가 남아 있는 늦은 오후를 찬찬히 걷다가, 어둠과 함께 예의 그 쓸쓸한 기운이 찾아올 때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으로는 찜닭을 먹기로 한다. 남편은 닭과 간장과 설탕과 마늘과 감자와 채소를 솜씨 좋게 버무려 넓적당면을 듬뿍 넣은 찜닭을 만들었다. 일상에서 빚어진 일상의 요리를 먹으며, 후식으로 엄마가 만들어 준 건포도와 대추와 밤이 찹쌀만큼 잔뜩 들어간 약밥을 곁들인다. 

 피곤했지만 평온했고, 마음이 가지런해지던 하루였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만든 요리에 기대 주어진 일상을 감당하며, 삶을 향한 사랑을 구체화한다.      


 무더운 여름 잘 보내셨나요? 오늘도 이곳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의 원문은 소믈리에 타임즈 '요리의 말들' 칼럼 https://www.sommelier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7743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어느덧 9월이네요. 이번달도 평안하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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