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급'의 의미
사관후보생을 시작으로 군생활을 하며, 몇 차례의 계급 변화가 있었다. 사관후보생, 소위, 중위, 대위, 그리고 전역을 기점으로 민간인의 시간을 순차적으로 겪으며 진급의 의미를 가장 극명히 깨달은 때는 대위 진급 발표 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당시 군생활 3년 차 정도에 접어든 나는 여전히 군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군에서의 일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미숙함이 당연하던 초급 장교 시절을 지나 후임들도 생기고 어느덧 중위 생활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군은 나에게 늘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대위 진급 발표의 날이 찾아왔다. 나는 그날이 진급 발표의 날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정중위 님. 축하드립니다. 대위 진급하신다고 발표 났습니다."
예기치 못한 축하인사를 들은 것은 앞 중대의 후배를 통해서였다. 갑작스러운 축하 인사에 순간 멍해졌다.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그 말을 곱씹은 후 비로소 내가 대위 진급 확정자가 된 상황임이 깨달아졌다. 당시 내가 임관한 여군사관의 경우 의무복무 기간이 3년이기에 의무복무만 채우고 전역할 경우 중위계급으로 전역하게 되고, 나처럼 복무 연장자나 장기복무자의 경우 대위 진급 대상자가 되는데 진급 대상자라는 이유로 모두 진급을 하는 것은 아니고 음주운전이나 복무 중 본인 과실의 사건사고가 있다거나 기타 부적합 사유들로 진급에서 늦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나는 특별히 부적합 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갑작스러운 소식이 믿어지지 않았다. 군에 계속 몸담고 있으면 언젠가 대위로 진급을 하겠구나 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지만, 내게 당장 현실감은 없는 일이었다. 군생활의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던 내게, 너무도 안정되어 보이는 대위 계급의 선배들이 나의 미래의 모습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저렇게 안정된(혹은 그렇게 보이는) 군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나에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당장의 나의 모습과는 너무 괴리감이 컸기에 그것은 막연하고도 너무 먼 미래였다. 물론 실상은 그럴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아서 잠깐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동안의 군 생활이 생각났다. 그만두고 싶었던 시간들, 도망치고 싶었던 시간들, 외로웠던 시간들, 내일이 찾아오는 것이 두려워 잠들기 싫었던 날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괴로운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절망했던 날들... 그 시간들은 단순 '고생'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시간들이 아니었다. 그 시간들이 모두 보상받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시간들을 이겨내고 견뎌내고 포기하지 않고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에 자꾸만 울컥했다. 나에게 대위 진급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신분 변화가 아닌, 무엇인가를 견디고 버티고 포기하지 않았기에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대위라는 계급은 내게 '대위'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자리였다.
가족들에게 진급 확정 발표 사실을 알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창장님(부대장님) 실에서 연락이 왔다. 진급 확정 발표 기념으로 창장님과 차 한잔 하자는 연락이었다. 함께 부대에서 진급 발표자가 된 군위관과 창장님방으로 찾아갔다. 축하인사를 들으며 차를 마시던 그때, 결국 그동안 쌓인 울컥함과 간신히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나를 뚫고 나와버렸다. 이러면 안 된다 싶으면서도 도무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시절 수없이 포기하고 싶었던 날들을 이어갔던 이유가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기에 였을지도 모른다. 군대는 기업이나 대부분의 조직처럼 그만둔다는 의지를 밝힌다 해서 바로 전역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정해진 기간이 있기에 그 기간 동안은 군인의 신분으로 있어야 하고, 개인의 변심이나 적성에 맞지 않는 등의 이유로 당장 그만둘 수 없다. 나는 차마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칠 수 없었다. 의무복무 대상자는 아니었기에 포기하는 방법은 있었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버티는 것이 포기보다 수월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버팀'을 유지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 하루를 보내고, 군에서 주어진 일을 하던 시간들에는 나 자신을 다잡을 용기가 필요했다. 끝내 그 시간을 견뎠고, 이겨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살아냈다. 그렇게 보낸 지난 시간들이 자꾸 생각났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 자리는 내가 생각했던 모습으로 나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미숙한 모습으로 의연한 척하며 군생활을 보내다가 전역했다. 하지만 군생활을 겪으며 나의 마지막 계급이었던 대위 진급을 통해, 한순간이라도 '진급'의 진정한 의미와 무게감을 느껴보았기에 값진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