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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여자 군인의 가벼운 고백, 두번째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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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수진 Nov 22. 2024

열정의 근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계속되는 시한부(時限附)의 사랑

여자 중대장님과 함께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사람의 열정(熱情,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의 근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요즘의 나는 이 질문에 붙잡혀 있다. 입대 후 어떻게든 끌어모으려 해도 좀처럼 모아지지 않던 그것을 넘치도록 가지고 계신 분을 만났다. 갓 임관한 소위도 아니고 군 생활 10년 차에 들어선 장교가 처음 마음과 태도를 간직하고 있음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뜨거운 마음에 노련함까지 덧붙은 그 열정은 쉽게 볼 수 없는 빛깔을 띠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마지막 군 생활을 장렬하게 불사르고 있다.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여자 중대장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살짝) 걱정했다. 우선 그와의 케미가 걱정되었다. 까칠하신 분이면 어떡할까. 나랑 맞지 않는 분이면 어떡하지. 심지어 나 같은 분이어도 별로일 것 같은데... (그게 가장 별로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의 사각지대를 찾아내서 혼내시는 건 아닐까. 이를테면, 남자 중대장님도 나를 혼내긴 했지만, 그분이 미처 못 보거나 못 혼낸 부분들을 가차 없이 찾아내 지적하시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 등등에 사로잡혀 약간의 걱정과 약간의 기대로 나는 그분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분이 내 앞에 나타나셨다. 그분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모든 것은 기우(杞憂)였음을. 나는 딱 나의 그릇의 크기만큼 그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분은 나와 비슷하지조차 않으셨고, 감히 비슷할 수도 없었고, 이제껏 봐온 여자 군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유형의 캐릭터. 천사가 형상화된 유형이라 해야 할까. 시기 질투 견제 험담 어느 것 하나 그분과 가까운 것이 없고 응원 격려 사랑 애정 밝음의 온갖 좋은 기운을 품고 계신 분. 야전생활 10년 차 장교라고는 믿을 수 없는 포스. 말하지 않아도 그릇의 크기가 느껴졌다. 100여 명 되는 중대원들과 중대 간부들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가진 분임을.

우리는 어떤 시각에 비춰 나와 관계하는 타인을 바라보고 있을까. 아마 스스로의 인식과 스스로 선호하는 취향에 따라 타인을 바라보지 않을까. 그분을 통해 느낀다. 나는 그냥 나 자체로 그분께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내가 소대장으로서 임무 수행능력이 얼마나 뛰어나고 어떤 사람인지 와 관계없이 그냥 나 자체로. 내가 직속 후배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직속 후배와 사이 안 좋은 경우도 많다.) 그에게 '나'는 단지 유일한 '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동일한 시각으로 중대원들과 다른 간부들도 그 자체로 인정하고 품는 그릇을 가졌다. 그게 그의 리더십의 빛깔이다. 그래서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그분이 중대장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보좌해 드리고 싶다. 그 마음이 자발적으로 생겨난다. 그의 리더십의 유형은 그렇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토록 뜨거운 중대장님이 전역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생을 군에 헌신할 듯 뜨겁게 태우다 10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이곳에 오셨다.(장기 복무를 하는 장교에게는 원한다면 10년 차에 전역할 기회가 주어진다.) 마지막을 앞둔 자의 뜨거움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 '짬을 먹다'라는 말이 있다. 군 경력이 오래되었다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긴장이 풀리고 군 생활에 임하는 태도가 느슨해짐을 뜻하기도 한다. 군 생활에 찌들어 초반의 풋풋함도 사라지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시기. 소대원들을 보면 상병이 꺾이는 전후? 장교는 대위 진급을 앞둔 중위 3년 차?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들을 보며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대원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멋모르던 소대장 초반 소대원들에게 당부했다. 전역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군 생활에 임하라고. 스스로를 위해서도. 때로는 그 생각에 얽매여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초임 간부의 패기였다. 나도 변했다. 열정은 진작에 바랬고, 어떻게든 순간을 넘기고 대충이라도 넘어가 보려는, 대부분의 것들을 타협해 버리는 내가 느껴졌다. 피곤하다고 피곤하다고 의욕이 없다고 합리화해 버리던 시간들. 그런 내 눈앞에 나타난 선배님을 보며, 나의 말의 가벼움이 참을 수 없게 민망하다.

누군가의 열정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누군가를 지켜보면 그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보인다. 나는 틈틈이 선배님을 지켜본다. 군대는 어디나 보는 눈이 많다고 들었는데 맞다. 나 역시 수없이 지켜봄을 당해 그 부담을 알면서도, 선배님을 지켜보는 일이 흥미로워 멈출 수 없다. 중대원들이 웃는 일을 보는 게 제일 좋다는 그분, 밤샘 근무를 마치고 다음날도 어김없이 현장에 나가 쉼 없이 업무에 임하시는 그분, 늦은 밤 행군을 마치며 완전군장을 메고 웃으며 내려오시는 그분, 늘 중대원들과 중대 간부들을 진심으로 대해 주시는 그분. 말뿐 아니라 사비(私費)를 써가며 수없이 베푸시는 그분.

그분을 보며 생각한다. 열정은 끌어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무엇으로 그 졍을 태울 것인가는 스스로에게 달린 일이리라고. 나는 과연 알고 있는가. 나의 열정에 무엇으로 불을 붙일 수 있을지. 그저 나의 열정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며, 어디선가 그것을 끌어오기를 나에게 열정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던 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나의 열정이 향하는 곳은 아직 모르지만 중대장님을 보니 알겠다. 중대장님의 열정은 '사랑'에 있다는 것을. 삶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잃지 않는 한 중대장님 삶의 열정은 멈추지 않을 것을 예감한다. 그리고 현명한 중대장님은 아마 알고 계실 것이다. 스스로의 열정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하루는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날 그분은 말씀셨다. 당신의 이상형은 이타적인 남자라고.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뜻을 되물었다. 사는 동안 그런 분은 처음 보았다. 이상형이 어떠한 조건이 아닐 수는 있지만, 성품 중에서도 이타적인 성품이라니. 과연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생각일까. 돈은 본인이 벌면 되니 전혀 상관없고, 이타적인 사람이라면 그 자체로 존경스러울 것 같다는 답변에서 내가 차마 범접할 수 없는 세계의 분임을 다시 깨닫는다.

중대장님의 등장으로 바라던 바 마침내 나는 친구가 생겼다. 존경하고 따를만한 친구. 재능에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그분은 다른 이에게 긍정의 기운을 불어넣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고민이 있을 때 그분께 상담하면 힘을 얻지 못하는 때가 없다. 상대의 장점을 낱낱이 파악해 힘을 실어주는 그분과의 대화를 마칠 즈음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커져 마음에 큰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나의 군 생활은 중대장님 등장의 전과 후로 나뉠 것 같은 예감이다.

이토록 뜨거운 분이 전역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는데 지켜보니 알겠다. 그분은 전역을 앞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불사르고 계신 게 아니라 모든 것을 후회 없이 불살랐기 때문에 전역을 택하셨겠다는 느낌이. 미련 없이 후회 없이 떠날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에. '군'을 위해서라면 중대장님이 남으면 좋겠지만, 중대장님을 위해 나는 그분의 전역을 응원한다.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 떠나시기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0개월. 나의 최선으로 그를 보좌해 군에서의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자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예감한다. 중대장님과의 시한부의 우정은 군을 넘어 계속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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