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뿌리를 찾아서
갓 중위가 되었을 때 창작물을 하나 만들었다. 군수 사령부 주최로 진행된 영상 공모전이 계기였다. 군 생활에 관한 자유주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대 막내 소대장이었던 나는 중대장님의 권유로 반강제로 공모전에 참여했다. 실적(!) 차원에서 누군가 참여해야 하는데 막내가 만만하고, 마침 여자 군인이니 화제성도 있겠다는 계획이셨을 것이다.
모든 걸 알아서 하라고 하시니 막막했다. 고민 끝에 떠올린 주제는 '꿈의 길목에서'. 내가 소대장이 되는 과정부터 시작해 전입 신병을 만나고 그 아이가 군 생활 간 성장하고 전역하는 과정까지 지켜보며 꿈을 향해 가는 과정을 응원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게 당시 내가 생각하던 소대장의 본질이었나 보다. 주인공은 나와 소대원. 영상 공모전이지만 동영상을 찍다가는 오글거려 쓰러질 것 같아 사진촬영을 하기로 했다. 사진을 찍고, 그걸 영상으로 엮자는 계획이었다. 함께 할 중대 아이들을 찾았다. 사진에 조예가 깊었던 아이를 컨택했고, 영상 편집을 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병장과 상병 그리고 나까지 넷이 주축이 되어 준비에 들어갔다. 신병부터 병장까지 연기할 소대원도 한 명 뽑았다. 아이들은 모두 성향이 다른데, 그 아이는 착하고 따뜻하고 밝은 아이라 나와의 케미도 좋고 함께 촬영하기에 적격이다 싶었다.
일단 대본부터 썼다. 제목을 '꿈에 길목에서'로 확정했으니 구체화할 일이 남았다. 의례 그러하듯 사실에 허구를 살짝 덧붙인 대본을 완성했다. 예를 들어 (직업 군인도 아니고) 잠깐 rotc였던 아빠의 영향으로 군인이 된 것 같다는 둥, 나는 어릴 때부터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었다는 둥의 약간의 허구를 덧붙여 이야기를 짜냈고, 대본을 완성해 촬영에 나섰다. 나름 열심히 찍었다. 소대원이랑 면담하다가 이 장면도 담으면 좋을 것 같아서 실제 상황에서 잽싸게 카메라 담당을 부르기도 했고, 오글거림을 불사하고 아픈 아이 간호하는 전형적인 장면(이마에 손 짚기), 생활관에서 tv 보는 장면, 현장에서 탄약 박스 나르며 일하는 장면, 빗자루질하는 장면 등등 연출도 하고 때로는 실제 상황을 열심히 찍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내 목소리 내레이션을 입히고(목소리에 자신 없다;), 나머지는 영상 담당 아이들이 나서서 내레이션과 함께 배경 음악을 선정해 모든 것을 영상으로 엮어 주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을 제출했고, 결과는... 낙방이었다. 참가상(스테인리스 물컵)을 받았다. 함께해 준 아이들이 많이 고마워서 개인적으로 선물은 준비해 주었다.
군 생활이 그리 오래된 건 아니지만, 초심을 기억하고 싶었는지 문득 그때의 영상을 꺼내봤다. 별생각 없이 꺼냈는데 깜짝 놀랐다. 난 대체 무슨 용기로 이 작품을 출품했을까. 영상만 봐도 화끈거리는데 낯선 내 목소리로 이어지는 내레이션. 나도 모르게 볼륨을 낮췄다. 혼자 보는데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분명 모든 것은 맨 정신으로 진행된 일이었는데. 그것은 초임 간부의 패기였던 것인가. 어쩌면 나는 용감한 사람이었던가. 심지어... 지휘 통제실에서 창장님을 필두로 모든 간부들이 모여 대형 스크린으로 나의 출품작을 감상했다고 들었다. 미쳤다. 역시 아무리 흑역사를 만들지 않으려 발버둥 쳐도.. 흑역사는 생긴다.
아무튼 이제 와서 민망함을 무릅쓰고 당시의 일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쩌면 모든 것은 다 무의식의 반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이 늘 향하던 곳은 '꿈' 아니었을까. 못 느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입대 초기부터 그 이전부터 나는 '꿈'에 꽂혀 있었나 보다.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을 뜻하는 '꿈'. 한동안 '꿈'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지낼 것 같다.
가볍지 못해서 차마 고백할 수 없는(궁금해하시는 분도 없겠지만) 영상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본다면 이렇다. '밤샘 근무가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라는 내레이션에는, 당직 근무 순찰을 마치고 와서 (평상시 하던 대로) 엎어져 자는 장면이 이어지는 식이다.
어쨌든 나는 그 작품을 가지고 있고, 덕분에 작품을 통해 그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살짝 안심했다. 과거는 과거로 끝났다는 것을. 즉 내가 굳이 들춰보지 않는다면 그 시절의 오글거림을 외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백'이라는 컨셉에 따라 용기를 내서 당시의 대본을 고백해 본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꿈★의 길목에서_어느 소대장 이야기
저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처럼 공부하고,
운동하고,
방학이면 아르바이트도 하고,
여행도 다니던 평범한 여대생이었습니다.
그런 제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군인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제게는 어릴 때부터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작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저를 군인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긴 머리를 자르고 훈련소에 들어가
1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군인이 되었고,
그런 제게 국가는 소대장이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소대장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훈련은 힘들었고,
익숙하지 않은 작업도 벅찼으며,
끝없는 소대원 관리와
계속되는 신병의 등장도 부담이 되었고,
밤샘 근무가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성별이 다르기 때문에 겪었던 어려움도 있었고,
소대원들과 같은 것을 공감할 수 없을 때도 있었으며,
힘들어도 의연한 척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선택에 있어서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인내를 배웠습니다.
기다림을 배웠습니다.
누군가가 존재 자체로 제게 가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값진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행복은 작은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흘릴 눈물이 제게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소망을 말하는 사람의 눈동자가 얼마나 빛나는지 보았습니다.
군대는 참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곳입니다.
저마다 꿈을 품고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 청년들이 한 번씩 머물다 가는 곳이 군대입니다.
오늘도 저는 꿈꿔봅니다.
저희 소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곳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며
더욱 성장해 이 사회의 기둥이 되는 그날을.
당신들이 꿈을 향해 가는 그 길목에 제가 서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