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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Dec 04. 2024

파견 가는 길

이곳의 특정 커플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2주간 잠시 육군본부로 파견을 간다. 지상군 페스티벌 안내 장교 임무이다.

 '지상군 페스티벌'은 육군이 주최하는 전군 최대 규모의 군 문화축제로, 병기 병과 소속인 나는 '탄약' 부스 안내 장교 임무를 맡았다. 육군 최대의 문화축제인 만큼 군인으로서는 물론 개인으로서도 의미 깊은 자리이고, 군 생활의 마지막 파견이 될 수도 있기에 더욱 뜻깊다. 마침내 군인의 신분으로 육본에 가본다. 짐부터 꾸리자. 전투복, 체육복, 개인 물품, 사복, 정복, 구두. 임관식 이후 정복을 입는 것은 처음이다. 정복에 신는 구두는 굽이 낮은 단화와 하이힐이 있는데, 임관식 때 강제로 신었던 수수한 단화 말고 이번에는 힐을 챙기기로 한다. 행사 간 장시간 서있으면 힘들겠지만.. 그래도 힐이 낫겠다.

 오랜만에 부대를 벗어나 대전으로 가는 열차에 오른다. 육본으로 바로 가야 해서 부득이하게 전투복 차림이다. 여자 군인인 나는 전투복을 입고 민간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에 부담이 따른다. 전투복을 입은 남자 군인은 별다른 시선을 받지 않지만 여자 군인은 다르다. 그냥 스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 번씩 다시 눈길을 주는 경우도 많다. 희소성에 따른 관심이지만, 이름이 새겨져 있는 전투복도 부담되고 불필요하게 시선을 받는 일도 내키지 않아 웬만해서는 전투복을 입고 민간세상을 다니지 않는다. 오늘은 어쩔 수 없지만. 열차 중간중간 현역병들을 마주칠 때도 있는데 그것도 내심 민망하고, (그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살짝 흠칫하고 곧 경례를 한다. 나 같아도 안 반갑겠다.) 몸가짐도 부담된다. 고개를 떨구고 자거나 졸면 안 될 것 같고, 열차에서 정자세로 앉아 가야 할 것 같은 마음. 무거운 캐리어를 선반에 올릴 때 한 번에 거뜬히 올려야 할 것 같은 마음.(무리하다가 어깨에 담 올 뻔했다.) 아마 이렇게 스스로를 가두는 편견이 나의 피곤함을 가중시키리라.  

 군 생활에는 가끔 훈련과 비 정기적 임무 및 특정 교육을 받는 등의 단기 파견(派遣)이 있고, 군사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는 기간이 있다. 부대를 벗어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가는 것은 일단 기분 전환 측면에서도 나쁘지 않다. 또한, 현재 연령 특성상 일부 파견은 '일정한 임무를 주어 사람을 보낸다'는 파견의 본래 목적 외에 다른 일도 있(을 것이)다. 파견 현장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미혼 남녀가 모이기에 가능한 일이 의외로 군대에도 있는 것이다. 커플이 되거나 새로운 썸이 시작되는 일. 겪었거나 동기들을 통해 들었던 파견 현장의 분위기를 떠올려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우리 또래가 참석하는 파견이나 교육 자체가 부대의 중책을 맡은 자보다는 누구든 대체 가능한 임무를 맡은 비슷한 또래의 간부들이 참석한다. 장교는 중위 전후? 대체로 미혼.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집단이지만 일부 파견, 예를 들어 초임장교 집체교육처럼 성비 차이가 많이 안 나는 상황도 있다. 양상은 예상대로 흘러간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눈에 들어오고, 마인드 적 측면이 가세한다. 이를테면, (부대에서) 매일 보던 얼굴만 보거나 여자 군인이 없는 곳에서 근무하다가 뉴페이스를 만난 새로움, 파견 기간은 끝이 정해져 있기에 성과(?)에 관한 적은 부담(잘 되면 따로 만나고, 안 되더라도 앞으로 안 마주칠 수 있다.) 및 단점을 감추고 장점을 어필하기에 용이한 짧은 파견 기간, 부대를 벗어난 약간의 자유에서 비롯된 열린 마음 등 아닐까. 또한, 훗날에 관한 기약도 가능하다. 당장 눈에 띄는 성과(!)는 없어도 안면을 트고 발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경우로, 틈을 봐서 언젠간 다가갈 준비를 해둘 수도 있겠다. 물론 다들 그렇지는 않다. 아무튼 요맘때 가능한 일이고, 덕분에 일부 커플은 이때 탄생한다.

 교육기관은 어떨까? 임관 직후 겪었던 초군반의 분위기를 떠올려보면, 그곳은 단기 파견보다는 장기(16주)이기에 이런 측면으로는 좀 더 체계적이기도 하다. 또한 동기들과 같이 있기 때문에 직접 참여하거나 참여당하지 않아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모르는 새 참여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건 아마 기수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떤 기수는 남자들끼리 교육을 받지만 나(여군사관)의 경우 임관 훈련도, 임관 후 초군반 교육도 남녀가 같이 받았기 때문에 예상 못 했던 군 생활의 새로운 측면을 경험했다. 요맘때는 정말 어디서든 커플은 탄생한다. 우리 동기들은 성비가 많이 차이는 안 났지만, (구체적 기수는 언급 않겠다.) 근처에서 교육받던 선배들이 일부 가세하기도 했다. 동기들은 한 교실에서 공부하니 관심 있는 상대에게 알아서들 노력하고 하지만, (특정인에게 인기가 몰리는 경향은 있다.) 선배들은 교육기관에서 서로 도움을 받으라고 공식적으로 1:1 멘토를 지정해 주는 것 외에 오가며 복도 같은 곳에서 안면을 트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이분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 접근하거나, 아니면 인맥을 통해 마음에 드는 사람 내지 알아가고 싶은 사람을 포함한 식사 모임을 주선하기도 했다. 드물긴 해도 직접 접근은 대놓고 호감을 표시하거나, 교육기관 취지에 맞게 과제 도움을 준다거나 물어보는 계기를 만드는 경우겠고, 식사 자리는 취지야 어떻든 군대 특유의 분위기는 있었다. 예를 들어 누구, 누구 같이 밥 먹자 혹은 누구 같이 오라더라 등의 제의가 오면 '내가 거 길 왜가?'보다는 선배니깐 당연히 초대에 응하는 분위기라 할까. 장교 임관 직후 1년 선배는 계급부터 다르고 엄청 선배 같으니깐. 그리고 우리는 여러 명이 함께 가니 누가 누구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지켜보는 재미도 있고, 잠깐 교육기관을 벗어나고 싶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나서기도 했다. 코멘트도 해준다. 누가 너한테 관심 있어 보이더라. 너 좋다는 사람 괜찮아 보이던데 등. 물론 대부분의 시간 우리끼리 놀고 남자 동기들이랑 가끔 족구 등등 같이 하기도 했지만, 예상 밖으로 군대에서도 그런 추억들이 있다. 그렇게 탄생한 썸 내지 커플들은 교육을 마친 뒤 흐지부지되기도 하지만, 결혼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결혼한 커플도 교육기관 인원수 대비 비율로 따지면 생각보다 많다. 혹은 그때 튼 안면을 계기로 훗날 당사자들조차 전혀 예상 못 했던 커플이 탄생해 모두 놀라기도 한다. 결국 사람 모이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

 끝으로, 이것저것을 떠나 파견의 이점은 또 있다. 파견 때 튼 안면이나 조금의 친분이 군 생활을 하다 보면 같은 부대에서 만난다거나 업무로 엮이는 등 도움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견을 가는 것은 확실히 안 가는 것보다 낫다. 그리고 대체로 파견 기관의 업무는 부대 업무보다는 할만하다. 일단 함께 근무하는 분들이 직속상관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맺어진 관계라 분위기가 좀 더 부드러운 부분도 있겠다.

 아무튼 덕분에 지금 나는 지상군 페스티벌 안내 장교로 육군본부로 가고 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제 대전역에 거의 도착하려고 한다. 이번 파견이 즐겁기를 바라며, 전투복을 입은 여자 군인 캐릭터에 맞게 짐칸에 올려둔 무거운 캐리어를 애써 사뿐히 내린다.


 안녕하세요. 수진 작가입니다. 이례적으로 직접 인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시작하고 계신지요.

사실 어젯밤의 일로 휴재를 잠시 고민했습니다. 이 시국에 이 주제 괜찮을까 싶더라고요. 이 주제는 아니고 이 배경이겠네요. 그런 고민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무사히 글을 발행하게 되었고, 연말이 다가오고 있어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공간에 찾아와 이렇게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쓰는 마음도, 읽는 마음도 다른 지점에 있겠지만, 그럼에도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으로 부족한 글이지만 이만큼 연재를 이어왔습니다. 확신 없는 연재였지만,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에 기쁘게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혼자라면 결코 이만큼 쓸 수 없었을 거예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날이 많이 추워졌습니다. 따뜻하게 입으시고, 오늘 하루도 순간순간 반짝이는 기쁜 순간들이 있는 날이 되시길 바랄게요. 좋은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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