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진 Dec 06. 2024

지상군 페스티벌 안내 장교

결국 배워야 할 것은

 별들의 천국에 왔다. 이곳 육군본부는 상징도 은유도 아닌 말 그대로 별(장군)들의 천국이다. 수많은 고위 계급자들이 모여있는 이곳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장군들과 영관급 장교(소령 중령 대령)까지 헤아려보면, 나 정도(대위(진)) 계급자는 종일 경례만 할 지경이다. 파견된 부서 선배님께서는 살짝 귀띔해 주신다. 본인은 이곳에서 장군께만 경례하고 나머지 분들께는 목례로 대체한다고. '선배님은 소령이시지만, 중위 계급장을 달고 그렇게 하면 너무 개념 없어 보이지 않을까요.' 소심한 나는.. 최대한 복도에 적게 나가기를 택한다.  

 야전에서는 희귀한 존재인 여자 군인은 육군 본부에는 정말 많다. 그럼에도 모두 근무복을 입고 근무하는 이곳에서 (군인의 옷은 전투복, 정복, 근무복이 있다.) 전투복을 입고 다니자, 외부인임이 단박에 드러났고 덕분에 우연히 마주친 여자 중령님께 식사 초대를 받았다. 종종 느끼지만 여자 군인들은 직속 선후배 간에는 초면에도 단박에 친근감이 형성되고 호의가 오가는 끈끈함이 기저에 있다. 덕분에 내일 선배님 댁에 가기로 했는데 벌써 기대된다. 육본 관사도 궁금하다.

 파견 기간 동안 나는 함께 파견된 후배와 육본 내 콘도에서 지내고 있다. 외관은 일반 콘도와 비슷하고 시설도 깔끔하고 관리도 잘 되고 있는데, 군 시설 특성상 관리하는 인원(관리 병)이 따로 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첫날 출근했다가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숙소가 일부 정리되어 있고 수건도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어서 당황했다. 사용한 수건을 따로 모아둔 것도 아니었는데, 개인 옷(속옷 포함) 및 개인 물품이 있는 방에서 관리하는 인원들이 사용한 수건을 찾아내 새 걸로 교체하고 이곳저곳 정리했을 것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불편했다. 그들은 그들의 임무겠지만. 결국 숙소를 관리하는 인원들에게 수건교체는 카운터에서 하고, 청소도 직접 하겠다고 방에 들어오지 말 것을 당부해 두었다.

 2주의 파견 기간 중 첫 주는 지상군 페스티벌 준비에 매진하고, 둘째 주는 안내 장교 역할을 맡아 실전에 투입할 예정이다. 그래서 첫 주인 지금 총력을 기울여 전시물을 손보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다. 창고에서 오래된 전시물들(탱크 모형, 다련장 로켓 모형, 미사일 모형, 탄약 모형 등)을 꺼내서 하나하나 도색하고 손보고, 안내판도 제작해 전시하기 적당하도록 만들었다. 특정 모형을 구하기 위해 판교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전시장에 오실 민간인들과 전국의 군인들에게 설명할 강의안을 지속적으로 암기하고, 군대답게 중간 점검(사열)을 받고 있다. 전시회 간 지참할 휴대용 교안도 만들었기 때문에, 막상 실전은 괜찮을 것 같은데 사열에서는 브리핑 준비 상태까지 점검받아야 하니 더욱 부담이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비군 훈련을 위해 주특기 공부를 틈틈이 한 덕분에 기초 지식이 조금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일을 마친 저녁에는 틈틈이 다양한 만남들을 경험한다. 육본에서 근무하고 있던 아는 얼굴들도 보고, 어제는 진급 발표를 대비해 부서 사람들과 식사 모임이 있었다. 어디나 그렇듯 군에서도 진급이 무척 중요하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계급 정년이 있는 장교의 세계에서 진급은 특히 중요하다. 그래서 진급 발표를 앞두고 '초조주(焦燥酒)'를 마시기도 한다. 초조주는 말 그대로 진급 전 초조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마시는 술이라는 뜻인데, 마침 파견 기간과 진급발표 시즌이 겹쳐 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대상자분은 결과를 어느 정도 예감하고 계셨는지 (안 될 것이) 확실해서 초조할 것도 없으시다며, 겉으로는 그냥 식사의 자리를 편안하게 즐기셨다.

 나는 문득 생각해 보았다. 평생 몸담아 헌신한 조직에서 진급이 안되어 떠나는 마음에 관하여..  결국 알 수 없는 마음이겠지만, 구체적으로 알던 몇몇 분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분들은 그럼에도 맡은 날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태도로 임하고 계셨다. (다행히도) 그 마음을 알 수 없을 나는 그럼에도 배워야 할 것은 끝내 최선을 다하는 태도 아닐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 되, 내가 주관할 수 없는 결과에는 깊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 말은 심플하지만 간절히 바라던 것이 무산된 그 실망감을 생각하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장기 복무를 지원해 결과를 기다리는 후배와, 진급을 앞두신 선배님들이 함께한 그 식사 모임에서 이 조직에서 바라는 것이 없는 나는 상대적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응원하며 한편으로는 그들이 부러웠다. 어떠한 것을 바라고 원하고 그곳을 향해 갈 수 있는 마음. 그것만 확실하다면 그래도 삶을 조금은 덜 헤맬 것 같아서....

 먼 훗날까지 기약하고 살필 수 없는 나는 일단 지상군 페스티벌 안내장교 준비 간에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그리고 내일 만날 예정인 여자 중령님도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그분은 과연 어떤 류의 뜨거움을 품고 계신지. 여자의 몸으로 중령의 자리까지 가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지.

 끝으로 이번주 배움 끝의 즐거움은 주말에 페스티벌 준비를 끝내고 합법적으로 잠시 본가에 다녀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역시 군 생활 간에 파견은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