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새로운 시작
오늘이다. 중대장님께서 군을 떠나는 날. 우리에게 시한부로 주어졌던 10개월을 함께하고 마침내 이별의 날이 왔다.
군 생활 통틀어 중대장님만큼 나를 사랑해 준 지휘관이 있었을까. 지휘 관계를 떠나 군에서 만난 사람들 통틀어 중대장님 만큼 나를 사랑해 주신 분은 없었고, 남은 군 생활 간에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한 시절 누군가에게 온전한 사랑과 신뢰를 받아본 사람은 안다. 그 애정이 한 사람을 얼마나 강하게 만들고 단단하게 세워주는지. 나조차 믿지 못하던 나의 가능성을 봐주신 분. 내가 얼마나 강하고 따뜻한 사람인지 알려주셨던 분. 이 조직에서 내게 허락된 날까지 최선을 다해 나의 자리를 지키라고 격려해 주시던 분. 나의 군 생활과 그분의 길은 다를 수 있으니, 갈 수 있을 만큼 멀리 가보라고 조언해 주시던 분. 떠나시는 날까지 나의 앞날을 염려해 주시던 분. 힘들고 지칠 때 그분을 찾아가 받았던 모든 격려를 기억하며, 군 생활의 남은 날들을 성실히 받아들이고자 다짐해 본다.
중대장님의 뜨거운 사랑이 담겼던 중대는 당분간 내가 맡기로 한다. 인사이동 시기가 오지 않아 아직 후임자가 결정되지 않았고, 내일부로 대위로 진급하는 나와도 시기적으로 맞아 중대장 임무가 공백 없이 이어질 수 있다. 첫 군 생활을 시작한 이곳에서 중대장이 되어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며 나 역시 이 부대에서 나의 마지막과 다음을 준비한다.
이제 이임식이 있는 연병장으로 향한다. 사열대 위에는 창장님과 각 중대 중대장들, 과장들과 참모진,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나의 중대장님이 있다. 사열대를 마주한 연병장 제일 앞에는 나와 기수(旗手)가 서고 그 뒤로 소대장들과 부소대장, 그리고 뒤를 이어 중대원들이 대형을 갖춰 서서 이임식을 준비한다. 차분하자. 울지 않는다. 오늘은 울지 않는다. 수차례 다짐한 뒤 중대장님을 보내드릴 이임식의 자리에서 마음을 다잡는다.
시작되는 이임식과 이어지는 이임사.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으시던 중대장님은 결국 눈물을 보이신다. 10년의 군 생활의 회고가 담긴 절절한 이임사를 힘겹게 이어가는 모습에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군을 떠나기로 결정하기까지의 뜨거운 진심이 느껴져 여기저기서 훌쩍임이 이어진다. 나 역시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지만 눈물까지 참아내기는 어렵다. 모두를 등지고 중대의 가장 앞에 서 있어서 다행이다. 이 시간 아무도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모를 테니.
이 시간을 끝으로 그와의 이별을 추억할 마음은 잠시 접기로 한다. 그와의 관계는 상관 이상의 관계였다는 것을 그가 떠나는 이 시간 깊이 깨닫는다. 메울 수 없을 빈자리. 그를 떠올리는 것으로 그리워질 시간들. 그럼에도 지금은 깊게 슬퍼할 시간이 없다. 당분간 나에게 주어진 중책인 중대장의 일만 생각하기로 한다. 의연하게 버티고... 잘 버티자.
부대 간부들과의 다과회와 중대 송별회를 마치고, 소대장들과 중대 간부들과 중대원들과 떠나는 그를 배웅한다. 부디 더 크고 넓은 세계로 나가서 이제는 자유롭게 사시기를. 위병소 너머 조금씩 사라지는 중대장님의 모습을 보며 깨닫는다. 그와 나와의 군인으로서의 인연은 여기까지지만, 우리의 인연은 군을 넘어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그는 앞으로 내 삶의 좋은 멘토가 되어 줄 것임을. 오래도록 그와의 인연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을 예감한다.
마음을 가라앉힌 뒤 이제 중대장실로 간다.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잠깐이지만 그의 뒤를 이어 이제 나는 중대장이 된다. 부디 이 중대를 최선을 다해 이끌어가자. 그간 나를 스쳐간 지휘관 들과 마지막 중대장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그리고 내일. 드디어 나는 대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