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 기간 다양한 일들 틈에서
지상군 페스티벌 안내 장교 3일 차를 지나고 있다. 준비과정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일까. 막상 실전은 준비 기간보다 수월하게 흐르고 있어 다행이다. 연 1회 있는 행사이기에 개막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고, 민간인들은 물론 전국 각지의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인원들도 찾아오고 있다.
차출 당해 뜻밖에 맡게 된 안내 장교 역할은 내게도 좋은 경험이다. 전시장에 찾아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전시회를 준비하며 공부도 되었고, 전시물을 설명하는 일도 의외로 어렵지 않다. 방문하시는 분들(타 병과 군인 및 민간인)의 눈높이에 맞추면 되니 전문적인 지식까지 필요 없고, 혼자 둘러보기 원하시는 경우에는 부연 설명도 필요 없다. 미리 만들어둔 휴대용 교안(수첩)이 무엇보다 신의 한 수이다. 막힐 때는 슬쩍슬쩍 참조하면 되니 설명할만하다. 가장 힘든 점은 불편한 정복을 입고 종일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 정도? 역시 힐을 택한 건 무리수였던가.
예상 밖의 업무로는 본업(안내 장교) 외에 부업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사진 촬영. 행사장에 온 기념으로 정복을 입고 있는 우리들과 사진을 찍자는 요청이 꽤 많이 이어진다. 사실 쑥스럽기도 하고 사진발도 안 받는 점이 이 와중에 신경이 쓰이기도 하지만 그런 개인의 마음을 내려놓고 이것도 임무라는 군인의 마음으로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찍힌 사진들도 결국 내가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하기도 하다.
종일 탄약부스를 지켜야 하는 나는 정작 축제 기간 동안 다른 곳은 못 보고 이 부스 내 작품만 보고 있다. 팸플릿을 보니 육군 역사관, 최신예 무기 전시, 한미연합군 전력 장비 전시, 특전사의 레펠 시범, 시가지 전투 재연, 장갑차·헬기 등의 탑승 체험, 전투기 시뮬레이터 조종, 군복 입어보기·병영식 먹어보기 등의 병영 훈련 체험, 드론 경연대회, 군견 중심의 애견쇼, 군마 체험, 포토제닉, 군악대 공연, 의장대 시범, 특공무술 시범, 뮤지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던데. 그리고 아까 옆 부스가 들썩이니 걸 보니 아마 연예병사들도 종종 카메라와 함께 지나다니는 것 같다. 일본 팬들 지나가면서 대화하는 소리 들어보니 '이준기'어쩌고 하는 것 같던데... 우리 부스에는 안 오려나?
아무튼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느리지만 시간은 분명히 흘러 어느덧 군 생활의 2/3 시점을 지나고 있다. 이제 다음 달이면 대위 진급도 하고.. 새로운 부대로 전출도 가고... 이변이 없는 한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새 부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어떻게든 또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평소 속해 있던 곳을 벗어나 파견 현장에 오니 군 생활이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인다. 일단, 전역 쪽으로 가닥을 잡은 건 잘 한 결정이라는 확신이 든다. 현재 내가 속한 야전도 그렇고, 지금 파견 와있는 육군본부도 그렇고 거쳐갔던 행정기관들까지 떠올려 보면 군 생활은 어느 것 하나 만만한 일이 없다. 아니, 이것은 일 자체가 아닌 이 조직과 나의 케미의 문제일 수도 있다. 단순 일 자체만 놓고 본다면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내게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이 조직에서 온전히 '나'로 살 수 없다는 부분 아닐까. 어떤 보직을 맡아 어떤 부대에 있어도 이 조직에서 나라는 사람은 결국 나로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육본에 와보니 그 생각이 명확해진다.
그건 그렇고, 페스티벌과는 별개로 살짝 신경 쓰이는 일도 하나 생겼다. 뜻하지 않게 어제 연락처를 받아 간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탄약 부스에 전시를 구경하러 왔길래 전시물들을 설명해 주었는데, 앞으로도 탄약 관련 궁금한 사항들을 문의하고 싶다며 연락처를 물었다. 같은 군인이니 업무의 연장이라는 생각도 들었고(병과가 달랐다. 탄약은 내가 속한 병기 병과에서 전문으로 취급한다.) 계급도 소위라 별생각 없이 연락처를 건넸는데 후에 문자를 보니 탄약 이야기는 없고, 사실 친해지고 싶다는 호감을 표시해 왔다. 나는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지만 다음 달이면 진급할 대위(진)이고 저쪽은 소위. 말 그대로 그냥 친해지고 싶은 것 일 수도 있는데.. 이곳에 있으니 친분을 쌓는 일조차 신경이 쓰인다. 여자 군인이 된 뒤 모르는 새 나는 과도하게 주변을 경계하고 방어하는 습관이 생겼다. 행여 구설수가 따라다니면 곤란하고, 호감이 없는 부담스러운 상대를 방어하다 보니 가끔은 내가 정상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기 검열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마 많은 여자 군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연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느낌부터 되짚어 보았다. 이상한 느낌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친해진다고 해서 문제 될 게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또한, 친분이라는 것은 어느 한쪽에서 쌓고 싶다고 해서 쌓아지는 것도 아니고 관심사가 다르거나 여러 가지 이유들도 미리부터 결정하지 않아도 때로는 자연스럽게 멀어지도 한다. 결국에는 친분이라는 것도 인연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고민 끝에 답을 보내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역시.. 파견 기간에는 이런저런 일이 생긴다.
이제 파견도 3일 차를 넘어가며 슬슬 끝이 보이고, 내일은 어느덧 내 생일이다. 그리고 주말에는 가족들이 전시를 보러 오기로 했다. 이래저래 일이 많은 이번 파견이다. 남은 시간도 끝까지 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