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만남도 있다.
왼팔의 전역일이다. 처음부터 본인을 소대장의 왼팔이라 불러달라고 하던 아이. 그 분대장이 이제 군을 떠난다. 소대원들과 함께하며 깨달았다. 소대원만 소대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님을. 소대장도 소대원을 의지한다. 가끔은 소대원들을 통해 말할 수 없이 큰 힘을 얻기도 한다. 소대원들을 통해 소대원들만이 채워줄 수 있는 그런 힘을 얻는 시간이 있다.
중대 선임 소대장이 되며 담당하던 소대가 바뀌던 날, 총명하고 센스 있는 분대장이 적극 소대장 편에 서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은 내게 얼마나 큰 지원군이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민간인이었을 때는 주변에 군대 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이 이별이었는데, 군대에 있으니 누군가의 전역일이 오면 그것이 그와 헤어지는 날이 된다.
소대원의 전역일, 마지막으로 소대원들과 갖는 대화의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가장 진실하게 자신 스스로의 모습으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 군 생활 통틀어 가장 진실하게 개인대 개인으로 만날 수 있는 시간. 자신이 아닌 군인의 모습으로 만난 우리는 전역날 자기 자신이 되어 헤어짐으로 이 만남을 비로소 완성한다.
전역하는 아이를 위한 나의 작은 선물은 문화상품권이다. 초임 소대장 시절, 동년배 중 가장 존경하던 선배가 있었다. 1년 선배였지만 배울 점이 많았고 평판도 좋아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소대장의 마인드를 배우기 위해 그를 관찰하거나 때로는 조언을 구했다. 그는 나와 병과도 업무도 달랐지만 소대장으로서 배울 점이 많았고, 전역하는 소대원들에게 문화상품권을 선물한다는 그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후에는 나도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boq 방에 불러서 맥주를 마시거나 회포를 푸는 등의 일들이 제한되었던 내게는 작은 선물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이 소대원과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나다운 마음 표현법이었다.
오늘은 왼팔의 순번이다. 잠시 중대장이 된 나는, 모두를 일단 현장으로 보낸 뒤 업무를 가기 전, 왼팔과 마지막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진심이 오가는 대화의 시간들. 소대장의 시간들 중 가장 사랑하던 시간인 그 시간을 오늘은 왼팔과 함께 보낸다. 그 아이의 전역 이후의 계획을 들으며 불현듯 마음에 이끌려 나 역시 말했다. 나는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다고.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든 이후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왠지 나의 바람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어서 좋았고, 그 상대가 나의 소대원이라 좋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앞으로의 바람을 들을 수 있어 정말 좋았다. 악수를 끝으로 그렇게 왼팔과 헤어진다. 아마 이 만남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리라.
현장으로 일하러 가는 길 기분이 복잡했다. 환희가 섞인 복잡함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소대원들과의 빛나는 마지막 시간이 있기에, 그래서 나는 녹록지 않았던 소대장의 시간을 이제껏 버텼는지도 모른다고. 긴 시간 함께했던 소대원들과 비로소 나 자신으로 만날 수 있는 이 시간을 위해, 나는 소대장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리고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전역 후 자신의 길을 찾아가라고, 함께 하는 동안은 군 생활에 최선을 다하라고 종종 소대원들에게 말하던 시간, 사실은 나 역시 함께 자라고 있었음을. 그들과의 첫 만남을 설렘으로 맞이하고, 친분을 쌓고, 때로는 상처받고, 상처 주고, 아프고 외롭고 견디던 시간 동안 그럼에도 우리는 사실 조금씩은 자라고 있었음을. 우리가 모르는 동안 그들의 꿈과 더불어 나의 꿈도 자라고 있었음을. 어쩌면 나는 내 진짜 심장 떨림이 어디서 오는지 알기 위해 그토록 긴 소대장의 시간을 지나온 건 아닐까.
갑자기 그 사실이 너무 아름답고 이 만남이 너무 귀하다는 생각에 울컥할 것 같다. 이 감정은 나중에 찬찬히 곱씹어 보자. 지금은 일하러 가야 하니깐.
사람과의 관계는 늘 좋을 수만은 없다. 소대원들과 나 역시 그러했다. 가까이에서 자주 지켜보다 보면 단점이 드러나고, 특히 군대처럼 힘든 일을 겪다 보면 더더욱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들이 튀어나오곤 했다. 그럼에도 함께했던 시간 덕분일까? 모든 시간을 넘어 마지막 시간이 오면 애틋해지고 떠나는 그 아이가 잘 되기만 바라게 되는 가장 깨끗한 생각이 나온다. 감사하게도 마지막에는 정말 그렇게 된다.
모든 것이 해피 엔딩일 수는 없기에 끝내 진실한 모습으로 만나지 못하는 소대원도 있다. 결국 그냥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한때는 스스로를 탓하며 상대를 원망하며 그것에 연연했지만 이것은 그 또한 받아들이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간다. 정확하게는 배워야 한다. 그 이상은 미련일 뿐이라는 것을.
이 시간 나의 이 깨끗한 마음이 빠르게 흐려질 것을 안다. 군 생활 간 나는 또다시 좌절하고 넘어지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슬퍼하는 감정들이 반복될 것을 안다. 또다시 아프고 수없이 흔들림의 날이 올 것을 안다. 하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찾아올 치유와 위로의 힘을 알기에 넘어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용감해질 수 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소대장 임무의 비밀 아니었을까. 내가 감당한 소대장의 비밀이 선명해짐을 발견하는 날이 오다니 이제 정말로 소대장의 시간에서 하산할 날이 오나 보다.
나는 아마 빠르게 저 아이를 잊을 것이다. 오래도록 잊고 지내다 아주 가끔 떠올릴 것이다. 어쩌면 처음으로 고백한 나의 바람조차 오래도록 잊을지 모른다. 그 아이 역시 그럴 것이다. 군 복무까지 마친 똘똘한 그 아이는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날개를 달 것이다. 아주 가끔 군 생활을 떠올리겠지. 그러다 정말 우연히 언젠가 우연히라도 만나는 날 그때 웃으며 만날 수 있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게 있을까. 우리의 만남은 이 헤어짐으로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