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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 같은 삶은 없지만

그럼에도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기억하며

by 수진

'시트콤(sitcom)' 주인공 같은 삶을 동경했다. 우울 슬픔 분노 짜증 미성숙... 자칫 스스로가 작아지고 초라해질 수 있는 류의 감정이 제거된 삶.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가볍게 받아들이고 웃음으로 승화시키거나, 애초에 상식 이하의 상황을 만나는 일이 좀처럼 없는 삶. 비 현실적이지만 그런 삶을 가끔 동경했다.

어딘가에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나의 삶을 보면, 나의 현실은 너무 녹록지 않았다. 마음가짐을 되짚어 보거나, 주변 환경에서 원인을 찾기도 하며 시트콤적 태도와 거리가 많이 먼 나의 시니컬함을 분석했다. '마음을 예쁘게 써야 하는 건 아닐까' 혹은 '왜 나에게는 이런 상황이 주어지고 이런 유형의 사람이 나타나는가' 등을 생각하며.


장류진 작가의 글을 좋아했다. 직관적 이미지로 그의 글을 감각해 보면, 그의 글은 예뻤다. 사람의 말과 행동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하고, 글 또한 자신을 닮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을 닮은 글을 쓴다. 글을 보면 대략적으로 작가의 이미지가 그려지는 것이다. 그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그의 글은 어떨까. 말하자면, 그의 글의 예쁨은 이런 예쁨이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의 속성을 품은 것에 관한 묘사를 자주 하는데, 묘사 대상 자체는 물론 그것을 묘사하는 글도 아름다운 묘사를 한다. 즉,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그의 글은 예뻤고, 그의 외적 이미지와 어우러져 작가+글+작품세계의 조화가 좋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그 예쁨을 기반으로 그에게 시트콤 주인공 같은 이미지를 떠올렸는지 모른다. 티 없이 밝은 반짝임을 지닌 삶.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전자책이라 아쉽지만. 책도 예쁘다.

그의 신작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을 읽으며 깨달았다. 그의 글을 장악하는 직관적 이미지인 예쁨에 가렸을 뿐, 사실 나는 그의 글에서 그려지는 현실적이고 시니컬한 삶의 단면들을 좋아했음을. 어쩌면 내가 좋아하던 그의 작품의 본질은 냉소와 시니컬함에 있겠다는 것을. (작품 해석은 읽는 이에게 달렸으므로. 그리고 애초에 그는 시트콤이 아닌 리얼리즘의 세계에 있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칭해온 '리얼리즘'은 에세이에서 절정에 이른다. 물론 이 책에서도 그의 전매특허인 아름다움에 관한 아름다운 묘사가 넘치도록 등장하지만(그는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에 관한 안목이 좋은 사람일 것이다. 덕분에 핀란드로 떠나고 싶어 졌고, 집을 북유럽 감성으로 꾸미고 싶어졌으며 마리메꼬의 우니꼬 패턴이 들어간 것들이 갖고 싶어 졌다.) 당연하게도 책은 핀란드의 아름다움에 관함이 전부는 아니었고, 내게 이 이야기의 정수는 모든 여행을 마친 에필로그에 있었다.

-'연수'를 3년 반 동안 썼다.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소설을 썼다고 자부했고, 그를 위해 때로는 조사 하나를 바꾸는 데 하루를 다 쓰고, 적절한 단어 하나를 찾는데 며칠 밤을 보낸 적도 있었다. (중략) 모두가 내가 쓴 책에 대한 칭찬만 해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책이 아직 인쇄소에 들어가지도 않았잖아.

-"작가님은 10년 뒤에 자신이 어떤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중략) "10년 뒤에도 부디 계속 쓰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때 마중홀의 그 눈빛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눈동자들은 육백 개의 거울 같았다. 계속 쓰고 싶은 마음. 사실 그게 원래의 내 마음이니까.

<장류진,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중>

찬란해 보였던 길 밖으로 마주쳐온 무수한 비방. 대외적인 생글거림과 밝음의 모습이 그가 아니라 할 수 없지만 그것은 찰나의 단면일 뿐, 그 역시 모든 글쓰기의 본질일 출구 없는 고민과 기약 없는 노력을 기반으로 뜨겁게 작가의 삶을 쌓아왔음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리고 언뜻 드러나지만 고통이 많았으리라 예상되는 작가 개인의 삶까지.

그는 애초에 작품도 삶도 철저한 리얼리즘에 속한 사람이고 그럴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는 알았다. 아름답지 못한 많은 리얼리즘 속 분명히 존재하는 아름다움의 강력한 한끝을. 본능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의 필력은 여기서 드러난다. 결코 아름답지 않고 지질하기까지 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때로는 시트콤 적 삶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가치를 그려낼 수 있는 필력. 그의 작품들이 종종 드라마화(化) 되는 이유는 이곳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당연하지만 시트콤 같은 삶은 없다. 그럼에도 그것이 아름다움조차 없는 삶이라 단언할 수 없다. 우리는 그래서 읽고 쓰는 것 아닐까. 찰나의 순간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 그래서 무수한 불합리함과 누추함과 연약함이 주를 이루는 리얼리즘의 세계에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반대의 개념이 아닌 공존의 개념으로, 부조화가 아닌 지극한 어울림으로. 그는 언뜻 상반되는 듯 보이는 그들의 가치가 사실은 상반되지 않았음을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철저한 리얼리즘 위에 쓰인 그의 글을 장악하는 가장 큰 이미지는 내게는 결국 '아름다움'이었고, 그 아름다움의 여운을 따라 이 글을 기록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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