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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맺는 시간

by 수진

첫 마음이 퇴색되면 한 번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가보는 것도 좋겠다. 첫 마음이 심겼던 그때로.


우리 후쿠오카 가서 살까.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떤 날이 펼쳐질지 좀처럼 짐작할 수 없어서. 여행으로 몇 차례 방문했던 아름답고 친절한 도시의 기억에 기대어 앞날을 그려볼 뿐이었다. '흥미로운 날들이 펼쳐지겠지. 아름다운 곳에서.'... 막연히 상상했다.

마음이 기울어 버린 이상 끝이었다. 붙잡고 싶은 것이 없었기에 홀연히 떠날 수 있던 삶. 후쿠오카의 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활인으로 찾은 후쿠오카는 새로웠다. 그리고 구체적이었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일상과 처음부터 후쿠오카에 머물던 이들의 삶. 모든 것이 가세한 후쿠오카의 날은 특별했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어쩌면 그래서 가끔은) 특별하게 힘들었다.

힘듦은 왜 빈번해 졌을까. 덕분에 홀연히 시작한 후쿠오카의 삶을 홀연히 맺고 싶다는 생각이 커질 즈음 한국행은 퍽 적절했다.

강렬했다. 소중함을 다 곱씹을 수도, 기록할 수도 없던 시간들. 그립던 얼굴. 궁금했던 얼굴. 머물고 싶던 공간. 설레는 정취... 쥐고 있을 때는 그 쥐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찬란한지 몰랐던 것들을 다시 감각했다.

강렬함은 찰나의 순간 지나갔지만, 강렬함 후 바로 삶으로 돌아오기 어려워 얼마간 그 안에 머물렀다. 일상과 추억과 앞날이 뒤섞인 그 어디쯤에서.

그럼에도... 여행의 완성은 특별함에 있지 않았다. 여행의 완성은 마침내는 일상으로 돌아옴 아닐까. 찬란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나를 지탱해 주던 굳건히 지탱해 주는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 반짝임과 특별함과 애틋한 시간들을 뒤로하고. 여행의 시간들은 일상 위에서 더욱 찬란하기에.

선명한 것은 하나였다. 여행을 기점으로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것. 어떤 것이 나를 강렬하게 관통해 버렸구나 하는 감각뿐이었다.

어떤 강렬한 시간은 그 절대적인 양과 관계없이 박제되는데, 이번 여행은 얼마간은 그랬다. 어쩌면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이전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시마에나가(シマエナガ, 홋카이도에만 서식하는 새)’ 오미야게

감정적 동요와는 별개로 실질적인 여행은 종료되었기에, 동료들을 위한 오미야게(お土産, 여행지에서 사 가는 선물. 토산품)를 준비했다. 이곳의 'K' 인기를 반영한 화장품과 간식으로 구성된 오미야게를 동료들에게 건네던 마음은 그랬다. '한국에서의 특별한 시간을 너에게도 전해주고 싶어.' (그것이야말로 오미야게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동료들에게는 진심이 담긴 인사와 더불어 이 여름 그들의 시간이 담긴 오미야게가 돌아왔다. 홋카이도(北海道)와 오이타(大分)와 자신이 태어나 자란 지역의 고유함이 형상화된 오미야게가.


첫 마음이 퇴색되면 한 번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가보는 것도 좋겠다. 첫 마음이 심겼던 그때로.

생각해 보았다. 나의 첫 마음을. 마음에 이곳이 심기던 그날을. 많이 바랬고, 바래버렸고, 어떤 부분은 너무 퇴색되어 처음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멀리 갔지만... 그럼에도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삶과 이곳에서 만난 이들의 마음과 머물던 시간의 선명한 기억. 이웃의 온기와 이곳에서 맺은 우정과 일상의 그 구체적인 얼굴을. 때가 되어 마침내 이곳을 떠나는 순간 그리움이 될 그것들을.

그것들에 기대어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어딘가 조금은 달라진 내가 되어. 앞날은 모르지만 이 순간 내가 있어야 할 이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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