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

나의 삶을 나의 언어로 풀어낸다

by 수진

군 전역을 기점으로 삶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면, 다음 장이 열린 것은 그 후 10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남편의 직장으로 일본으로 이사오며 다시 새로운 삶의 장을 맞이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코로나로 일본행은 최초 계획보다 지연되었고 마침내 다시 일본에 오게 된 것은 전역한 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에 시기상으로 적절했다.

가족의 삶에 대한 큰 계획은 있었지만 내 삶의 구체적 계획은 없었다. 조용하고 고요한 삶이 이어지리라 막연히 생각했다. 최소한의 인간관계를 맺고, 최소한의 활동만 하며 지내는 고요한 날들이 이어지리라... 적응기간이 지나고 일본 생활에 익숙해지며 깨달았다. 나는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조용히 지내기에는 나는 너무 마음이 뜨거웠고, 나의 몸은 제한된 공간을 견디지 못했다. 달리러 나갔고, 혼자만의 시간 아지트로 지낼 공간을 탐색했다. 그리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새로운 삶에는 새로운 친구들이 깃들었다. 더 이상 확장되지 않을 것 같던 인간관계가 시공간을 초월해 확장됨을 겪는 일은 기뻤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유치원 선생님들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 회사 사람들..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아도 새로운 관계들이 나타났고, 그 와중에 적극적으로 관계 맺고 싶은 분을 만나면 용기를 내 한걸음 더 나아갔다. "혹시 괜찮으시면 아이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열 번도 넘게 시물레이션을 거듭 한 뒤, 용기를 내서 아이 유치원 친구 엄마를 초대했다. 그가 기쁘게 수락한 덕에 지금까지 일본생활 전반에 관한 조언과 정보를 얻으며 도움을 받으며 친구로 지내고 있다. 또한 신기하게도 다시 일본에 온 뒤로 오래전 유학생활이 끝나며 끊긴 인연들이 다시 나타났고, 아직도 일본에서 지내는 분들도 계셔서 그분들을 통해 일본생활에 도움 되는 정보들도 얻을 수 있었다.

한때 더 이상의 새로운 인간관계는 필요치 않다고 여길 때가 있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로 이미 충분하고, 내 삶에 새로운 사람들의 자리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었다. 당시는 그것이 옳다 여겼지만, 그렇게 살았으면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도, 더 이상의 배움도 없을뻔했다. 시간이 지난 뒤 당시 나의 편협함을 깨달았다. 더는 발전하지도, 성장하거나 변화하지도 않는 삶을 살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 텐데...

또 하나 신기한 것은 새로운 관심사가 끌어온 삶의 확장이었다. 최근 '글'이라는 강렬한 관심사가 생겼고 새로운 관심사가 생기자 그로 인한 인연들이 나타났다. 브런치와 블로그등 인터넷 플랫폼을 통해 많은 글들을 접하고, 책을 읽고,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글'에 대한 누군가의 열정은 나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마음에 울림을 주는 글을 쓰는 분들이 부러웠고, 영혼을 찌르는 글에서는 전율을 느꼈다.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 삶의 핵심을 글로 뽑아내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글을 쓰는 분들에게 배움을 얻고 싶었다. 새로운 관계들이 글을 통해 맺어지고, 홀로 글을 쓰는 시간 동안 나는 고립되지 않았음을 경험하는 것은 기쁨이었다. 글을 쓰는 일은 나에게 밝은 기운과 열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새로운 관심사를 품고 새로운 환경에서 뻗어나갈 나의 내면이 몇 년 뒤에는 내게 어떠한 것들을 끌어당겨 줄지, 나를 어떠한 곳으로 데려가 주고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줄지 기대해 본다. 가끔 글을 쓸 때면 아득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잘 쓸 수 있을지 확신도 없을 때 그 아득함에 사로잡힐 때 읽게 된 책에서 어느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또 흔히 나는 글재주가 없다, 개성이 없다고 말하는데 많이 써보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 나의 삶을 숙고하고 나의 경험을 나의 언어로 말하는 훈련을 반복하기 전에는 '글재주'와 '고유성'은 드러나지 않고 드러날 수 도 없다"(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잘 쓴 글이든, 미완의 글이든, 숨겨둔 글이든, 파일로 저장하지 않고 날리는 글이든, 그런 과정 하나하나가 자기 생각을 정립하고 문체를 형성하는 노릇이며 '삶의 미학'을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못 써도 쓰려고 노력하는 동안 나를 붙들고 늘어진 시간은 글을 쓴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기 한계와 욕망을 마주하는 계기이자 내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타인과 인사하는 시간이라고, (중략) 이 세상에 어떤 글도 무의미하지 않다고, 우리 어서 쓰자고"(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가슴이 뜨거워지고 용기가 생기는 글이다. 그게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마음이 동하는 일이 있으면 일단 써보자. 그러지 않고서, 써보지 않고서는 결코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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