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다정함

조용하지만 강력한 다정함의 성품

by 수진

누군가 가지고 있는 요소 중 많이 사랑하는 요소는 '다정함'이다. '다정함'을 떠올리면 단어 자체가 가진 따뜻한 기운에 사로잡혀 이미 마음에 온기가 생긴다. 일상의 곳곳에서 다정함을 만나는 일을 사랑한다.

오래도록 기억되는 다정함이 하나 있다. 군생활 2년 차를 지나던 시점이었다. 당시 소대장으로 복무하며 군생활에 지쳐있던 나는 유학시절 앓았던 안면마비의 기운이 가끔씩 한쪽 얼굴에서 다시 감지되며 불안해졌다. 부대장님의 배려로 긴 휴가를 내서 얼마간 쉬기도 했고, 퇴근 후 침을 맞기도 했지만 피곤하거나 무리하면 불현듯 예의 그 싸한 기운이 마비를 앓았던 얼굴에 내려앉음이 느껴졌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피로누적과 영양 불균형과 스트레스가 초래했을 안면마비를 생각하니 그때와 상황이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초조했다. 한차례 겪어본 안면마비는 구체적으로 두려웠다. 당시 한 달의 시간이 지난 후 풀렸지만 놀랐던 마음과 무력감과 절망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안면마비의 지속적 방어를 위해 퇴근 후 한의원에 가는 빈도수를 늘렸다. 극적으로 호전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침을 맞는 동안은 쉴 수 있고 안 맞는 것보다는 좋을 것이라는 안도감에 계속 한의원을 찾았다.

하루는 나의 상황을 아셨던 부대장님께서 새로운 한의원을 추천해 주셨다. 그 지역에 오래 살았던 군무원님께서 아시는 곳이라 신뢰감이 들었고, 그분은 한의원이 본인의 집에서 가까우니 퇴근길에 안내해 주겠다고 하셨다. 그가 일부러 시간을 할애할 것이 미안했지만, 길눈이 어두웠던 나는 낯선 곳을 혼자 헤맬 시간이 없어 감사한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오래전 일이라 한의원의 풍경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침을 잘 놓는 곳이었을 것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었을 그날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해 준 건 그날 겪은 다정함이었다.

한의원을 안내해 주신 군무원님은 식사를 제안하셨다. 사실 배가 고팠지만 친하지 않은 분과의 식사가 불편할 것 같았고, 그의 개인시간을 빼앗는 듯한 미안함에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진심이 담긴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 해 함께 근처 죽집으로 향했다. 그분이 추천해 주신 요리는 매생이 굴죽이었다. 굴은 비릴 것이란 편견에 꺼려왔는데 처음 먹어본 매생이 굴죽은 따뜻하고 맛있었다. 스트레스받지 말고 마음 편히 지낼 것을 조언해 주시며, 본인이 아무리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 해도 때로는 주변에서 스트레스를 줄테고 힘들 수 있겠지만 가능한 한 마음 편히 군생활하라고 격려해 주신 다정한 이야기가 맛있는 음식과 함께 온기가 되어 마음을 데워주었다. 그분의 호의에 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몸 상태는 바로 호전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안면마비의 재발은 없었고, 그날의 온기는 오래도록 남아 한동안 내게 따뜻함을 주었다.

생각해 보니 살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껴 인연을 맺는 지점도 대부분 '다정함'에서 기인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는 다정함이 발휘되는 순간이 좋았다.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잠깐의 미소일지라도, 작은 호의일지라도 그것이 어딘가로 향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그로 인해 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 좋았고, 그것이 나를 향해 발휘되는 순간은 기쁘고 설렜다.

일본의 삶에서도 많은 일상 속 다정함을 만난다. 다니는 안과 병원 의사 선생님의 안부 속에서, 생활하는데 불편한 것은 없는지 세세하게 마음 써 주시는 옆집 아주머니와의 대화 속에서, 유치원 유인물들을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 주시는 같은 반 아이엄마의 문자 속에서, 넘치도록 풍성하고 맛있는 먹거리를 자주 보내주시는 시가 가족분들의 손길 속에서, 아파트를 깨끗이 청소하고 관리해 주시는 분들의 인사와 미소 속에서.. 가끔 이곳이 타국임을 선명하게 느끼는 순간이 있고 타인의 차가움에 마음을 다치는 순간이 있지만, 그 이상으로 자주 만나는 일상의 다정한 순간들을 내게 타국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용기와 안락함을 준다.

살다 보면 미운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누군가 미워지려 할 때 그의 방어막이 되어 준 것도 본인의 다정함이었다. 누구나 미세할지언정 대부분 다정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발견하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향한 시각이 조금이라도 너그러워지고 미움의 크기가 줄어듦이 느껴졌다. 좋은 점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안 좋은 사람은 아닐 거라고, 다시 기대하게 만들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경우까지는 집착하지 않았지만, 다정함은 누군가를 미워하며 내 마음에 독이 쌓일 것을 많이 막아주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나는 내가 겪은 다정함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나의 다정함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매생이 굴죽만큼의 다정함은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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