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출근 마지막날이다. 문득 지금이 내 인생 처음 맞은 계약만료라는 걸 깨달았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더 중요한 사실은 내가 이곳에서 더 근무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근무기간이 짧아서 가능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좋은 일만 있었던 게 아님에도 어쩐지 나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6개월 뒤에 다시 와."
자료실 담당 선생님은 그만두기 며칠 전 계약을 연장할 수 없는 현실을 미안해 하며, 6개월 뒤에 다시 오란 말을 했다. "더 좋은 곳에 가게 되면 어쩔 수 없고."라는 말도 덧붙였다. 6개월 뒤에 내가 오지 않으면 선생님은 실망하실까? 나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당장은 좀 놀거지만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선생님은 같이 일할 날을 기다리겠다는 덕담을 해주셨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준비(?)하면서 사서직 공무원을 뽑는 경로가 교육청과 시청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시험 일정이 동일해 한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지역에서만 있는 특수한 경우인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시험은 일 년에 단 한 번만 치뤄진다.
6월 둘째 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로 경험 삼아 시험을 봤다. 100문제를 100분 동안 풀고 마킹해야 하는 시험은 예상대로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찍신은 강림하지 않았고, 점수는 엉망이었다. 예초에 될 거라고 생각하고 간 것이 아니니 중요한 것은 점수가 아니었다. 이날 나는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시험 전후로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려야 했다. 의사 선생님은 평범한 사람들도 예민해져서 약을 먹곤 한다며 나를 달랬다.
내가 수험기간을 버틸 수 있을까? 시험을 정상적으로 치를 수 있을까? 의사 선생님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자고 말했다. 하루하루에 집중하는 것. 내가 수험생활을 하는 동안 가슴에 새겨야 할 마음가짐이다. 핸디캡이 있다고 쭈뼛거려 봤자 아무 소용없다. 냉정하게 말해 실패에 대한 핑계, 도망칠 구멍을 찾는 것에 불과하다. 그냥 하루하루 버티며 살다보면 뭐라도 되겠지.
다시 백수가 됐다. 약 1년 반 동안 미뤄뒀던 일을 하나씩 처리하다보면 여름도 훌쩍 흘러가버릴 것이다.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 맞춰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약속을 잡았다. 코로나 초기에 퇴사해 본가에 내려왔고, 벌써 삼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코로나 때문에, 다음엔 나의 건강 때문에, 그리고 멀어진 거리 때문에, 직장 때문에. 그렇게 4년 가까이 못 본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이 지역에서는 집 근처 도서관 외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수험준비를 하는 틈틈이 지역 도서관 탐방도 계획하고 있다. 야간근무로 3개월 동안 멈췄던 독서모임도 다시 시작할 거고, 상반기에 수강했던 오일파스텔 수업이 하반기에 개설되면 또 참여할 거다.
누군가는 지금 당장 수험 준비를 해도 시간이 부족한 판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수험생도 사람이니까. 나는 초반에 열 내다 지치는 러너가 아니라 꾸준한 러너가 되고 싶다. 그리고 최근에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에 가서 공부해봤는데 약 때문인지 졸음이 심하게 몰려 온다. 집에 있을 때는 침대에 파묻혀 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딱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열심히 살 거다.
마지막 출근일은 그간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며 마무리 됐다. 십 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평화롭게 회사를 나온 적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나의 퇴사는 대부분 내가 그만두는 걸 못마땅해 하는 관리자와의 싸움, 어떻게든 퇴사 시기를 지연시키려는 피말리는 시도들로 점철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