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메르인 Jul 27. 2023

외국인 가사도우미 덕분입니다

워킹맘 혼자서는 안 돼요

"여우주연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워킹맘 혼자 국제학교 보내기'의 수메르인!"

"감사합니다. 이 모든 공은 우리 집 가사도우미 M에게 돌리겠습니다!"


도우미에 대한 감정을 응축한다면 이런 장면일 거다.


애초에 남편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홍콩에서 3년간 일하기로 결심한 건 가사도우미 제도가 잘 되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입국하자마자 도우미부터 구하기 시작했다. 일이 잘 풀리려고 그랬는지 동창회에서 만난 후배가 도우미를 소개해 줬다. 자기 도우미의 올케인데, 원래 가기로 했던 집이 꼬여서 새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다. 일을 정말 잘한다고 보장한다고 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메일로 자기 여권사본을 보내고 짧은 영어로 잘 부탁한다고 했다. 문법이 좀 틀린 게 있었지만 메시지는 명확했다. 필리핀인인 M은 사십 대 중반으로 나보다 몇 살이 많았다. 남편과 대학생인 자녀는 필리핀에 살았다. 경력은 10년이 넘었고 주로 서양인 집에서 일했다고 했다.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남기고 타국살이 해야 하는 심정을 쉽사리 헤아리기 어려웠다. 


인생을 통틀어 고용되기만 했지, 고용인이 되어본 건 처음이었다. 홍콩은 외국인가사도우미(Foreign Domestic Helper) 제도를 두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저출산 타개를 위해 벤치마크하고 싶은 그 제도다. 표준 양식에 따른 계약서를 이민청에 공증받아야 전용 비자가 나온다. 최저임금은 4300 홍콩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70만 원 정도다. 추가로 숙식을 제공해야 하고, 2년에 한 번은 비자 연장을 위해 고국에 보내는 비행기표를 부담해야 한다. 나중에 임금에 비례한 퇴직금도 줘야 한다. 수속을 위해 에이전트에 백만 원 정도의 비용을 지불했다.


내가 렌트한 아파트는 도우미방이 딸려있었다. 방이라기엔, 창문이 달린 창고가 더 적합한 말이었다. 가로 세로 2미터, 1.5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보통 규격의 침대는 당연히 들어가지 않아서 맞춤해서 넣었다. 문을 열면 오른편엔 침대가, 왼편엔 벽을 중간쯤 가로지르는 넓은 선반이 있었다. 그 좁은 공간을 M은 알차게 사용했다. 벽에는 어디선가 얻어왔을 해바라기 그림을 걸었다. 물건들의 출처는 주로 친구들의 고용인이 버려서였다. 고가의 리모와 캐리어를 얻어온 적도 있었다. 나도 안 쓰는 물건을 종종 줬는데 반가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침 7시 12분에 셔틀버스를 탔다. 도우미는 다섯 시 반쯤 일어나 아침식사와 아이들의 도시락을 준비했다. 8시에 내가 출근하면 아이들이 셔틀버스를 타고 하교하는 오후 세시까지는 설거지, 청소, 다림질 등 집안일을 했다. 내가 퇴근하는 일곱 시까지 서너 시간 동안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워킹맘이라 동네 한국인 친구를 만들어주지 못했고, 아이들은 집에 와서 도우미와 지내며 영어만 썼다. 둘째는 내가 한국어로 이야기해도 영어로 대답했다. 도우미 덕에 영어몰입교육은 확실히 되었다. 아이들의 영어 억양에 가끔 필리핀 영어가 묻어 나왔다. 


M이 한식에 익숙지 않아 영어로 된 한글요리책을 하나 사 주었다. 된장찌개에 홍고추를 구하지 못해 대신 당근이 들어있었다. 당면을 국수라고 생각했는지 잡채를 파스타같이 서빙해 주었다. 처음에는 간이 안 맞아 고생했지만, 반복해서 먹다 보니 혀와 위가 받아들였다. 서양사람 집에서 오래 일해서 양식은 정말 잘 만들었다.


일요일은 휴일이었기 때문에 M은 우리가 일어나기도 전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왔다. 도우미들은 도심의 넓은 곳에 모여 휴일을 보냈다. 센트럴은 필리핀, 코즈웨이베이의 빅토리아파크는 인도네시아 구역이었다.  땅바닥에 박스를 펴서 깔고 앉아 각자 집에서 싸 온 음식을 나눠 먹었다. 간혹 젊은 도우미들은 모여서 음악을 틀고 춤을 추기도 했다. 센트럴에는 일요일은 도우미들만 가는 맥도널드 지점이 있다고 했다. M도 가끔 먹다 남은 맥도널드 감자칩 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내가 좋은 고용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오후에는 도우미 말곤 집에 아무도 없었고, 저녁식사 이후에는 퇴근한 셈 치고 일을 시키지 않았다. 간혹 다른 도우미들이 위생 관념이 없다던가, 물건을 훔쳐간다거나, 이런저런 사고를 친다는 소리가 들렸다. M은 성격이 꼼꼼해서 일을 잘했지만 자기주장도 강했다. 문화 차이 때문일까 가끔 M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고 영어가 짧은 내가 항상 불리했다. 뉴스에는 주로 본토인의 도우미 학대 뉴스가 심심치 않게 나왔고 집회도 간간히 열렸다. 


우리 넷은 유사 다문화 가정과 같았다. 내가 돈을 벌어오는 가장이고, M은 집에서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필리핀 배우자였다. M이 떠나는 날에 꼭 안아주었다. 누군가에게 그만큼 순도 높게 고맙다는 느낌이 든 적이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홍빠오를 뿌리면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