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권력자는 무슨 옷을 입나

by 수메르인

회사가 사회공헌 기금을 하나 만들었다. 남들 다 한다는 ESG 경영에 편승하려나보다. ESG는 Environmental(환경), Social(사회), Governance(지배구조)의 첫 글자를 딴 단어다. 환경보호, 사회공헌, 윤리경영 등을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경영 방식이라고 한다.


기껏 기금을 만들고 홍보를 빼먹으면 안 된다. 그럴듯하게 출범식을 개최한다. 내외 귀빈도 초청하고 언론사도 불렀다. 적적해 보이지 않도록 직원들을 동원해 자리를 메꿨다. 그렇다, 나도 동원된 직원 중 하나다. 외부 인사는 정부 부처의 고위공무원, 대학교수 등 과연 사회지도층이라고 퉁쳐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출범식의 하이라이트는 테이프 컷팅식이다. 검은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도우미들의 안내에 따라 사장과 초청인사들이 단상에 올라 일렬로 섰다. 도우미들이 곧이어 머릿수만큼의 황금색 가위가 놓인 쟁반을 들고 왔다.


세상에는 황금색 가위란 게 존재한다. 그 가위로 물건을 자르면 잘린 도마뱀 꼬리가 다시 생겨나듯 자른 단면에서 뭔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세상은 대체로 그렇게 경이롭지 않다. 혹 관심이 있다면 인터넷에 "컷팅식 오픈식 행사용 금장가위"를 검색하면 구입할 수 있다.


단상 위에는 전부 육십 대쯤으로 보이는 남자들 밖에 없었다. (물론 도우미는 제외다.) 검정이나 진한 회색의 양복 일색이라 서로가 잘 구분되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그 옷을 입고 있었던지 전체적으로 은은한 생활주름이 박제돼 있었다. 바짓단은 생뚱맞게 복숭아뼈 중간쯤에서 끝나있었고, 앉으면 양말 위 맨살이 살짝 보였다. 딱히 흠을 잡을 건 없었지만 멋있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상관없었다. 잘 입을 필요가 없는, 남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니까.


현대만큼 최상위 권력자가 옷을 수수하게 입었던 적도 없다. 옷을 허름하게 입을 수 있는 것이 권위인 시대다. 스티브 잡스는 프레젠테이션마다 검은 터틀넥에 청바지를 입었다. 마크 주커버그는 회색 티셔츠만을 입었다. 전 세계 대통령들도 대부분 짙은 색의 정장을 입는다.


오히려 업무적으로 옷을 잘 입어야 하는 건 갑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을이다. 우리 거래처 영업직들은 옷을 아주 잘 입는다. 맞춤양복임이 분명한 핏에, 꽤 고가로 보이는 시계를 차고 있었다. 머리는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뒤로 넘겼다.


이제는 신분제가 철폐된 시대다. 고가의 옷으로 부를 과시할 수 있겠지만, 부를 꾸미는 것도 가능하다. 옷의 역할은 신분의 표시에서 자기의 표현으로 옮겨갔다.


과거에는 옷으로 신분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권력의 정점인 왕 만이 특정색의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보라색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없었다. 합성염료가 발명되기 전이라, 모든 색은 천연에서 추출했다. 보라색은 고둥의 점액질을 오랜 시간 동안 작업해야 만들 수 있었다. 보라색 염로 1그램에 고둥 1만 마리가 필요했다고 한다. 조선의 왕은 빨간색 옷을 입고, 중국의 황제는 황금색 옷을 입어 자신을 드러냈다.


매일 아침마다 뭘 입고 출근할지 고민이다. 짙은 색의 정장 몇 벌만 돌려 입으면 되는 남성들이 부럽기도 하다. 여성은 선택의 범위가 다양해 오히려 괴롭다. 직장에서 입는 옷은 자기의 표현이라기 보단 신분을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아직 충분한 권위와 권력이 없기에, 옷은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는 수단으로 아직 유효하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는 기사가 갑옷을 입는 심정으로, 아침마다 무난한 셔츠와 바지정장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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