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과 방패의 대결
내가 다니는 회사는 먹이사슬의 중간 단계다. 본사는 목줄을 쥐고 사사건건 간섭한다. 하청업체는 우리 회사에 납품하려고 애를 쓴다. 갑과 을을 동시에 담당하기에, 가끔 정체성의 혼란이 온다. 장점은 있다. 일단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 쉽다. '저들은 왜 그러는 거야'의 '왜'를 알 수 있다. 이유를 알아도 여전히 화는 난다. 좀 더 실용적인 장점은, 을에게서 배운 것을 갑에게 써먹을 때다.
갑이 된다는 건 의외로 수월치 않다. 갑질을 당하는 건 수동적인 고통이지만, 갑이 된다는 건 능동적인 스트레스다. 을은 갑에게 맞춰줘야 한다. 짜증 나지만 내 선택의 폭은 좁다. 반면 갑은 재량이 크다. 필요 이상으로 강압적이면 을이 반발을 한다. 틈을 보이면 을이 비협조적이다.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회사 간의 갑을관계의 균형을 어느 정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갑과 라포(rapport)를 형성하면 이상적이다. 라포는 상호신뢰관계, 즉 두 사람 사이에 감정교류를 통한 공감이 형성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공감 가는 사람에게 팔이 굽기 마련이다.
칭찬은 "진심으로"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처음에는 부담스럽게 느껴도 1. 듣다 보면 사실로 믿게 되거나 2. 아부인 걸 알아도 기분 나쁘지 않다. 말하는 사람 스스로가 그렇게 믿어야 '진심인' 표가 난다. 그렇지 않으면 인지부조화가 와서 괴롭다. 사기꾼의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속이는 게 아니라 스스로부터 그렇게 믿는 것.
선을 넘지 않되 끊임없이 한계를 시험한다
갑에게 보일 호의는 클수록 좋다.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선물이건, 식사건 "이 정도면 받아도 되나?"라고 갈등할 정도가 적당하다. 통한다면 다음에는 좀 더 단계를 높여도 좋다. 기대치를 계속 높이면 예산 등 현실적인 면에서 지속가능하지 않으므로 어느 정도 강약 조절은 필요하다. 선물은 디저트 같은 간식이 무난하다. 내구재(?)는 취향에 맞지 않으면 처치곤란일 수 있다.
디테일이 중요하다
사소해 보여도 '여기까지 신경 쓴단 말이야'라는 포인트가 중요하다. 그래야 경쟁자들 사이에서 돋보일 수 있다. 나와 갑은 1:1 관계지만 갑 입장에선 을이 다수인 경우가 많아 비교가 쉽다. 갑이 모르는 것 같아도 티가 나게 마련이다.
자, 이제 을이 되어 습득한 스킬을 갑으로서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을은 법인카드를 활용해 갑에게 좋은 대접을 하기 마련이다.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자. 좀 없어 보인다.
누가 갑인지 확실히 알려준다
특히 여자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관계를 중요시하는 입장에서, 거래상대방과 껄끄러워지는 게 부담스럽다. 그러나 회사 간 갑을 관계에서 나는 엄연히 회사를 대표한다. 내가 만만하게 보이면 나의 구성원도 같은 취급이 된다. 서로의 이익이 상충되는 관계에서는 갈등의 표출과 조율 없이 결론이 나기 힘들다.
화를 내야 할 때는 내야 한다. 친절한 게 능사는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을은 끊임없이 갑을 시험한다. 느슨한 구석을 보여주면 파고든다. 특히 서열관계에 익숙한 남자들이 더욱 능숙하다.
감정적으로 화가 나는 게 아니다. 경험상 여기선 화를 내야 하는구나 라는 지점이 있다. 우리 쪽의 요구사항에 대해 상대방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룬다. 화를 낼 타이밍이다. 내가 이 상황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 일종의 롤플레잉이다.
적당한 거리를 둬야 한다
남자들이 취약한 부분이다. 앞서 말했듯 을은 갑과 라포를 형성하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당신이 내 갑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배울 사람이라 친해지고 싶다'라며 접근할 것이다. 친분과 업무의 경계가 흐릿해질 확률도 크다. 유착은 보통 그렇게 시작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안전하다.
써놓고 보니 모든 것을 뚫는 창과 모든 것을 막는 방패 같은 이야기다. 회사는 빈번하게 전장에 비유된다. 전쟁에는 전술과 전략이 필요하다. 갑과 을이 교차되는 회사생활도 노하우를 알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