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번째 밤

무기력하게도 조급합니다

by 숨결
무기력하게도 조급합니다



생각보다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러다 얼마지나지 않은 시간으로부터 나는 말끔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노라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가끔은 누군가의 입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이기도합니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자기들이 떠날 때를 어렴풋이나마 알고있다고요.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날을 준비하다 얄궃게도 정말로 때맞춰 그날이 다가오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들 입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들이 그들의 먼 여행길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거나 하나의 전설처럼 멋지게 만들어주는 극적인 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인간으로서 극복하지 못할 존재를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멋진 마무리로 장식될 수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헌데 말입니다 K. 이제는 그저그런 꾸며낸 이야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문만은 아님을 저는 알게 된것 같습니다. 지금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그제인지도 모르도록 침대에 누워 흘러가는 시간의 너울에 울렁울렁 몸을 맡겨 잠기어 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아' 하는 소리없는 짧은 탄성과 함께 알았습니다. 내게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노라고.


무얼 해야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작별인사를 해야할까. 무언가를 남겨야할까. 하지못한 많은 미련들을 털어버려야할까.

노트를 열어 작별인사를 해야할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보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것들을 적어보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이나 이루고자 했던것들을 적어보았습니다. 흔히들 위시리스트, 버킷리스트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적어내려간 목록들이 결코 적지는 않았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저라는 사람이 얼마나 하는 일이 많고 얼마나 욕심이 많았습니까. 얼마나 사랑을 원했는지 알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저는 그 목록들을 바라보며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왤까요.

이미 저는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체는 살아있을지언정 저의 영혼은 이미 죽어있습니다. 아마도 당신을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었던 그때부터겠습니다.

하루가 하루인지 모른 채 의미없는 존재로 걸어다니고만 있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감흥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그저 육신마저도 눈을 감을 날이 다가왔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텅 빈 영혼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냥 이대로 머물겠습니다.

내일은 없고 오늘이 눈앞에 있어 살아가는 나그네같이 하루들을 머물러 있겠습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눈앞의 것들에 움직이고 반응하는 공허한 영혼으로 머물다 가겠습니다.


혹여 이렇게 적는 편지에 오해를 하실까 염려가 되어 덧붙이자면,

저는 스스로 상처입히거나하는 방법으로 멀리 떠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주십시오.

앞서 말했던 모든 이야기처럼 떠날 때가 되어 떠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리 떠나는 것입니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날에 잠시나마 먼발치에서 당신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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