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네 번째 밤
이제는 사진을 지울 수 있습니다
비가오는 가을밤 입니다
이런저런 일정이 많아진 요즘 피곤해진 몸이지만 크게 무리하지 않으려고 간간이 운동도 하고 잠이 모자라다 싶으면 낮잠이라도 청했더니 컨디션이 나쁘진 않습니다
그래도 살이 또 한층 빠져버린걸 보면 무리를 아주 하지 않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저의 새로운 사랑은 사진 찍는 걸 즐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난지는 넉달. 함께하기로 약속한지는 어언 한달여가 되어가는 지금에도 함께 찍은 사진은 몇장 되지가 않습니다
텅 빈 사진첩을 보며 아쉬운 마음에 근래 들어서야 함께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그녀도 이젠 제 맘에 대한 의심을 걷어졌는지 싫지 않는 모습입니다
실은 가끔 옛 사진을 찾아보느라 핸드폰의 사진첩을 뒤져보거나 메신져에 저장된 사진들을 훑어보곤 했었습니다. 클라우드 서버에 저장된 옛 사진들이 있다고 알림이 와 열어보는 날들도 있었지요
그러면 필연적으로 당신과 함께했던 날들의 사진 뭉치들을 지나치곤 합니다. 아픈 마음에 못본척 지나쳐 버릴때가 대부분이지만 이따금씩은 미술관의 작품을 감상하듯 한장 한장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기억하고자 하는 사진은 지우지 않는 습관도 있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혹시 언젠가 끊어졌던 당신과의 인연이 다시금 연결이 된다면 '나는 여전히 네 사진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어'라고 말하고 싶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인연과의 출발선에 서 있는 지금
저는 더 이상 당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파하지 않도록, 새로운 사랑에 대한 예의를 위해서 당신의 사진을 지우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한 장씩 사진을 지워가는 순간들이 아프지는 않습니다. 어딘가 아릿함이 타고 올라오지만 더 이상 북받쳐 오르는 눈물의 벽을 두들겨대는 아픔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저 스스로도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나봅니다. 제가 이 사진들을 지운다하여도 더 이상 아파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요. 지워지는 순간의 이전에도 아쉬워할 사람은 저 혼자 뿐이었다는 것을요. 아파할 당신은 오래전부터 없었다는 것을요
제가 기억하는 당신이라면 저에게 잘 했다고 칭찬해 주었을겁니다
제가 알게된 그녀라면 저에게 잘 했다고 칭찬해 줄 것입니다
저 역시 당신의 사진첩에서 제가 지워진다 하더라도 아파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혹여 어딘가 지우지 못한 사진을 지워야 한다면 저와 같은 마음으로 그 사진을 지우셔도 좋습니다
저 역시 당신에게 잘 했다고 칭찬해 드릴것입니다
K
그동안 저는 언젠가 당신과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는 상상을 많이도 해왔습니다
요즘도 그 상상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전에는 그 상상 속에 당신과 나. 둘 만이 존재했다면
지금은 당신은 당신의 사랑과, 저는 저의 사랑과 함께 마주치는 상상을 합니다
그렇게 마주친 서로가
'네가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입을 닫은 채 마음 속으로 말하며 그리고 겨우 보일듯한 미소로 웃으며 지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