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아홉 번째 밤
마음에도 청소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제목을 만들기 위한 단어를 선택하는데 꽤나 애를 먹었습니다
쓰고 싶었던 내용은 제 마음과 기억 속에서 당신의 흔적을 지워내는 일이었는데
적어도 추억 속에서 만큼은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을 '청소'라고 해버리면 웬지 당신과의 추억이 먼지나 얼룩같은 취급을 받으며 지저분해져버리는 안타까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더 괜찮은 단어가 도저히 떠오르질 않으니 제가 청소하려는 기억, 마음이 절대 지저분하지 않으며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는 전제를 확실히 해두고서 편지를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K. 당신과 함께한 5년이란 시간동안 당신을 초대해 만들어 두었던 제 마음의 방은 마치 창고로 쓰던 어린시절 시골집 다락방처럼 온갖 추억의 잡동사니들이 가득해져 있습니다. 당신이 떠난 이후로는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지니 저 홀로 마음의 방문 앞에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멍하니 먼지가 쌓여가는 방을 바라만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사람을 초대해야합니다
초대한 방에는 당신과 함께 찍어둔 사진이 벽 위로 한가득 붙어있고, 당신과 함께 모아온 추억상자들이 천장에 닿도록 쌓여있습니다. 이런 풍경으로 그 사람을 초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때문에 저는 눈물을 참고 용감히 방에 들어가 청소를 시작해야만 합니다
쌓인 먼지를 털어냅니다
방 한가득 붙어있는 사진과 액자들을 떼어내고
벽 위로 예쁘게 적어내린 당신과 내 이름이 보이지 않도록 덧칠을 합니다
넘치도록 쌓인 추억상자들을 방 밖으로 꺼내야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건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상자를 꺼내볼 일이 없도록 한쪽 구석으로 밀어넣고 새하얀 천으로 덮어 끈으로 꽁꽁 묶어둡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이게 무언지 궁금해꺼내 볼지도 모르지 메모도 남겨봅니다
'2015년 6월~2020년 7월 / <K와의 사랑> / PS.꺼내보지 말 것.'
청소가 끝난 방을 후련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K 당신과의 추억상자들만이 아니라 나의 가족, 나의 친구들을 위한 진열장이 놓여져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보다 이전의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상자들이 당신의 상자들보다 더 구석진 곳에 쌓여있습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이다보니 조금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이렇게 쌓여나가다보면 내 마음에 더 이상 누군가 들어올 수 없는 날이 닥쳐올까봐요
지금 제 옆에 있는 분께서도 혹시나 너무 좁다란 제 마음의 방에 실망하면 어쩌죠
그래도 아직은 청소를 하고 차곡차곡 정리를 해 두었더니
둘이서 도란도란 차 한잔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따뜻해진 방에 잠시 누워도 볼만한 공간은 남아있어 보입니다. 게다가 그런 걱정마저도 사치일 정도로 요즘 제 새로운 연인은 참 따뜻한 사람이라 구석에 쌓인 당신의 상자더미를 보고 이렇게 말해줍니다.
'저렇게 추억이 쌓여서 우리가 등을 기댈곳이 생겼네. 지나간 사랑은 다 좋은 사랑이야. 봐바. 이렇게 우리가 기대고 앉을 수 있게, 또 이렇게 탁자처럼도 쓸 수 있는 가구가 되어주었잖아.'
K. 당신의 마음의 방에 쌓인 나와의 추억상자들은 잘 정리되어 있나요. 그곳의 상자들도 당신의 새로운 인연과 함께 하기 위한 가구가 되어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