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해 보이기도, 조금 피곤해 졸려 보이기도, 그리고 우울해 보이기도 하는 목소리였습니다.
"나 그 아이를 본 것 같아. 아니 봤어."
전화기의 건너편에 있는 사람과 그 사람의 10년 전 연인. 그리고 저는 10년 전 서울의 어느 번화가에서 카페 사장님, 일식집 사장님과 알바생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카페에서 일을 하는 동안 사장님이었던 누나와 바로 옆 일식집의 형은 열애를 시작했었더랬죠. 그 모습은 퍽이나 재밌지 아니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유달리 개성이 강했던 둘은 함께 하고 나니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습니다.
으레 있을 법한 만남 뒤에는 또 으레 있을 법한 헤어짐이 있지요. 그 두 사람도 각자의 사정으로 서로를 토닥이며 이별을 고했습니다. 둘 다 좋은 사람이었지만 카페 사장님과 친분이 더 두텁기도 했고 그 이후로 일식집 형은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현재로서는 카페 사장님이었던 누나와만 가끔 연락을 하고 지냈습니다.
그런 데면데면한 날들을 보내다 뜬금없는 연락이 온 것입니다.
"내 가게 앞에 공사중인 건물이 있는데 거기에 일하러 왔나봐. 열흘정도 일한 것 같아."
"인사라도 한거야?"
"아니..."
카페 사장이었던 누나는 지금은 서울을 벗어나 본가 근처에서 작은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0년 전 그 옛날의 장소와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곳이지요. 일식집을 했던 형은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가게를 하기 전 목공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가게를 그만두고는 목공일을 다시 시작한게 아닐까싶습니다.
"처음 유리창 너머로 그 아이를 봤을 때는 그냥 그 아이를 닮은 사람이네 했어. 그러다 몇 번 더 눈길이 가고나니 그 아이네 싶었어."
"확실해? 10년이나 지났잖아."
"응. 맞아. 확실해. 그 아이가 좀 특이하잖아. 뒷태도 그렇고 걸음걸이도 그렇고. 몇 번 보고나니 확실하더라."
가게 유리창 밖으로 이차선 도로 건너편이었지만 그리 뚜렷하게 보일만한 거리는 아닐겁니다. 거기다 하루 왠종일 마주보이도록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며 지나다니는 와중에 드문드문 보였을겁니다. 그럼에도 기억을 하나봅니다. 10년이나 지난 사람의 뒷태가 어땠는지. 걸음걸이가 어땠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이에요. 그 사람이 확실하다고 느껴질 만큼 기억할 수 있나봅니다.
"인사라도 하지 그랬어. 나쁘게 헤어진것도 아니었잖아."
"그러게..."
"누나도 그렇지만 형도 누날 봤다면 인사라도 한 번 할것이지."
말끝을 흐리는 누나의 말에는 아쉬움인지 모를 여운이 남아 흘렀습니다.
"있잖아. 정말 그래. 왜 인사한번 하지 못했을까. 왜 그자식은 나한테 인사한번 하러 오지 않았을까. 내가 이동네에 있는거 그자식은 알기 때문에 날 못알아봤을린 없거든."
"둘 다 소심하기론 부러워할 사람이 없긴하지. 어떻게 사귀었었는지도 신기할 정도로."
아닌 척 하지만 누나의 목소리는 울먹임으로 젖어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 살아도 상관없는 오래된 인연이었기에 아쉬울 것도 사실 없었습니다. 인사 한 번 나누지 못한 10년만의 만남이지만 구태여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고 해서 슬퍼할 정도로 오래된 사랑이 끓어오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슬픔은 보이지도 않는 틈으로 새어나와 눈물이 되었습니다.
K
언젠가 당신을 한번쯤 마주치고 싶다곤 했지만, 10년 뒤를 상상해본적은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3년 정도였을까요. 1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당신을 마주쳤을 때 나는 당신에게 과연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네볼 수 있을까요.
이제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순간의 마주침으로 당신의 행복을 확인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 소망은 그리움의 늪에서 그저 당신을 보고 싶어 투정부렸던 하찮은 핑계일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막연히 행복하게 살겠거니 하며 평생 한 번의 마주침 없이 살아가는 것이 서로의 행복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나의 울먹임에서 반드시 그래야겠다고 굳게 다짐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