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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숨결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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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결 Jun 25. 2022

장마

단편선#01

장마



 올해 장마는 유난히 길다. 이전 연도에 폭염으로 고생했던 때를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이지만 길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내밀게 되면 바짓단을 적셔버리는 빗줄기가 반갑지만은 않았다.   

  

“작년 여름에 우리 뭐 했더라.”


현과 지우는 신림동 원룸 침대에 누워 한쪽 벽으로 난 작은 창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세먼지가 비에 씻겨 내려가나 했는데 자욱하게 낀 안개가 건물 위로 뭉글하게 자리 잡아 별다를 게 없는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작년? 글쎄. 바다를 갔던가?”

“아니야. 바닷가에 있는 펜션들이 너무 비싸서 우리 못 갔잖아. 그래! 우리 계곡엘 갔었어.”

“아. 맞아. 계곡이 다 말라버려서 허탕치고 돌아왔었어.”    

 

지우는 현의 불룩한 배를 베개 삼아 구겨지듯 누운 채로 말했다. 작은 원룸에 들어 올 수 있었던 싱글사이즈 침대에 둘이서 교차로 누워있기 위한 최선의 자세였다.   

  

“정말 어이가 없었지. 계곡물이 말라버릴 줄이야. 분명 인스타그램에는 물이 가득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는데.”     

“말라버렸단 얘기는 하나도 없었다구.”     

“그래도 닭백숙은 맛있게 먹고 왔잖아.”     

“아니야 이 멍청아. 매운 거 먹고 싶다 그래서 닭도리탕 먹었거든.”     

“그랬나? 그럼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먹었나보다.”     

“뭐? 어떤 년이랑 먹었어. 당장 말해.”     

지우는 벌떡 일어나 뾰로퉁한 얼굴로 현을 바라보며 질책했다.     

“있어. 불같은 성격에 잘 삐지고 아주 귀여운 여자. 지우라고 있어.”     

“아 뭐야. 누구냐고.”     

“뭐긴. 우리 계곡 두 번 갔거든. 닭백숙도 먹고 왔잖아.”     

“아차. 그때 정신이 없어서 시켜놓고 먹질 못했지. 아까워라. 잔뜩 먹고 왔어야 했는데.”

“아주머니한테 닭 손질하는 것만 잔뜩 물어보더니 시체 같은 얼굴로 끓고 있는 닭백숙 쳐다만 보더라. 생리하는 날이었나?”     

“시끄러. 나름의 엄청난 고민이 있었다구.”     


지우는 다시금 현의 배를 베고 누웠다. 지나간 시간들은 지워두고 당장 닥쳐진 현실만 보고  싶은 맘이지만 그것이 또 쉽게 마음먹은 데로 되지는 않는다.       

먼지가 잔뜩 들러붙은 창에 며칠째 비가 흐르자 오히려 깨끗해진 느낌이다. 비가 그치고 나면 저 먼지들도 씻겨 내려갔으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흘러내린 빗줄기 모양을 따라 먼지의 길이 잔뜩 생기고 물방울로 남겨진 자리에도 그 모양 그대로 발자국처럼 희뿌연 자국이 남을테다.     


“작년 여름 참 더웠지. 습하지도 않고.”     

“응. 뭐라도 바짝 말라버릴 계절이었어. 그 계곡의 식당에 있던 닭들도 다 말라버렸을지도 몰라. 피만 잘 빼서 널어두었다면 말이야.”     

“나도 그때 바짝 말라 버렸잖아.”     

“뭐래. 이렇게 배가 투실투실한데.”     

“그때 식당 아주머니한테 닭 손질하는 방법 물어본 건 나 때문이었던 거야?”     

“아니라곤 못하지.”     

“어떤 걸 알려주셨어?”     

“성격이 안 좋으셨어. 그렇게 자세하게 알려주시진 않더라. 그냥 닭털 뽑는 법. 목 자르는 법. 피를 빼고 내장을 빼내는 방법 같은 거? 은근히 기계로 하는 게 많더라. 털 뽑는 거랑 피 빼는 것도 탈수기 같은 기계를 이용하는 거 자기도 알았어?”     

“탈수기 같은걸 쓴다고? 아니 난 몰랐지. 신기하네.”     

“응. 닭 목을 비틀어 죽인 다음에 목을 잘라서 기계에 넣으면 탈수기처럼 뱅글뱅글 돌면서 털이 빠지고 피가 빠지는 거야. 뭐 사이사이에 미리 해두란 것들도 있었는데 잘 기억은 안나.”     

“배웠으면 나한테 백숙이라도 만들어 주려고? 그런데 한 번도 안해줬잖아.”     

“...몰라. 청소나 해야겠어.”     


지우는 현의 투정에 퉁명스레 답하곤 조용히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났다. 싱크대 아래의 드럼형 세탁기에는 건조가 끝난 빨래가 따끈하게 온기를 웅크리고 모여 문을 여는 즉시 온기를 내뱉을 것이다. 하지만 설거지거리는 물론 물자국 하나 없이 주방은 스텐리스 상판이 반짝였고, 바닥에도 지우가 거닐며 머리카락을 떨어뜨리지 않는 이상 치울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뭘 더 치우려고 그래. 자기 언제부터 너무 강박증이 생긴 것 같아.”     

“다 너 때문이지 뭘...너한테서 냄새라도 나는 건 싫단 말이야. 곧 손님도 오기로 했잖아. 깨끗이 해둬야지.”     

지우는 이미 정리 정돈이 끝난 탁자와 서랍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빨래를 꺼내 차분히 갰다. 티쳐츠와 양말. 속옷 따위가 참 지우의 손끝에서 정갈하게도 접혔다. 정갈한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진 했지만, 그때까지도 빨래에는 건조기의 온기가 한껏 남아있었다.      


킁킁. 다 개어진 빨래에 코를 묻었다. 짧은 숨으로 두 번, 긴 숨으로 한번.     


“빨래를 해도 네 체취가 항상 남아있는 느낌이야. 세제를 엄청 넣어도 그래. 그게 나쁘진 않아.”   

  

빨래는 온기와 함께 서랍장에 다시 한번 정갈하게 정리되어 자리 잡았다.     


‘띵동. 띵동.’     


“생각보다 일찍 왔네. 그래도 다행이다. 정리는 다 끝냈어.”     


지우는 침대에 누워있는 현에게로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날 아주머니가 닭고기를 말리는 법을 알려줬어. 강아지한테 먹이고 싶다고 했더니 알려주시더라. 건조한 곳에서 바람을 잘 쐬어주래. 작년엔 참 더웠고 우리 원룸은 바람이 잘 들어서 좋았어. 아참. 뱃속에 베개를 넣어서 미안해. 그치만 너무 딱딱해서 어쩔 수 없었어.”      


현은 대답이 없었다. 침대에 누워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오늘 하루종일 처음부터 대답이 없었던 것처럼.     


“안녕. 그동안 행복했어 내 사랑.”     


장난스런 미소가 지우의 입가로 번졌다. 눈가에는 창에 맺힌 물방울과 닮은 눈물이 함께 맺혔다. 인터폰 화면엔 제복을 갖춰입은 경찰이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는 장마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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