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척 그만두기

by 수미

누리던 것들을 내려놓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몸은 편리한 것들, 좋아 보이는 것들에 민첩하게 길들여진다. 반면 불편하고 번거로운 삶으로 돌아가는 일은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어쩔 수 없이 험한 길을 가야 할 때, 고개는 끊임없이 뒤를 돌아본다. “한때는 내가 말이지...”를 되뇌이며..


나 역시 그랬다.

우리가 행복이라 믿는 삶에 집중하자며 쿨한척 남편에게 사직서를 내라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회사에서 제공하던 널찍한 집을 떠나 오래된 작은 집으로 이사해야 했고, 회사차는 반납하고 뚜벅이 생활이 시작됐다. 장을 볼 때도 파 한 단, 마늘 한 쪽까지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다. 내놓라하는 이름의 유치원에 다시 가고 싶다는 아이의 투정에 가슴이 무너졌고, 그사이 직장관둔 남편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한숨만 쉬었다. 집안은 묵직한 정적에 빠져버렸다.


사람들은 혜택 많던 회사를 그만두다니 대차다 하지만 속사정은 어떻게든 다시 그 ‘소굴’로 돌아가고 싶은 비겁함이 올라왔다. 남편은 자신이 사라진 자리에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돌아가는 회사를 보고 자신이 그저 하나의 소모품이었음을 깨닫고는 더 깊숙이 소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언젠가 떨어질 행운을 망연히 기다렸다. 허망한 바람 사이 남편의 몸은 더욱더 무너지고 결국에 병원치료까지 받아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나는 ‘괜찮은 척’하고 사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남편은 담배를 끊고 술을 줄였다. 체중을 관리하고, 병을 악화시키는 생활들을 스스로 멀리했다. 나는 운동을 권했고, 남편은 학창 시절 부모님의 반대로 시도조차 못 했던 꿈의 운동인 복싱을 선택했다. 선수로 살아볼 시간은 지나버렸지만, 그는 운동에 진심이었다. ‘왜 하필 맞고 때리는 운동이냐’며 비아냥대던 나는, 그에게서 처음 보는 반짝임을 보았다. 운좋게 다시 들어간 새 직장, 야근과 초과근무에 역시나 시달리면서도 그는 시간을 쪼개 복싱장을 찾았다. 그렇게 7년. 복싱, 금연, 절주의 일상이 그를 단단히 만들었다.


그 시절 단단함으로 그는 환경 공무직 시험의 체력 테스트를 가뿐히 통과했다. 우리는 여전히 오래된 집에 산다. 장을 볼때면 여전히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고, 통장 잔고는 빠르게 줄어든다. 하지만 남편은 건강해졌고, 복싱장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가볍다. 우리가 잃은 것들은 많았지만, 대신 서로를 더 오래 곁에 두게 되었다. 그것이면, 지금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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