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리수리마수미 Feb 24. 2022

시다에서 밤장미로

손재주 많던 아버지는 남의 집 재봉사로 한동안 일하시더니 자기 공장을 차리겠다 하셨다. 80.90년대 봉재업이 성하던 대구에서 아버지의 조그마한 공장 재봉틀은 밤낮없이 돌아갔다. 살림만 하던 엄마는 시다(옷을 개고 들고하는 잡일)와  아이롱(다리미질)이라는 일제식 이름으로 불리는 허드레일들을 담당하고, 손이 빨랐던 나 역시 초등학교 때부터 쉬는 날이면 공장으로 불려 가 먼지 펄펄 날리며 연신 담배 피워대는 재봉사들 사이에서 시다 일을 했다. 주문량이 많아지고 손은 모자라자 아버지는 시다바리를 더 구해야 한다며 문방구에서 다발로 A4사이즈 갱지를 사다  '시다 구함'이란 문구와 유선 전화번호를 반복해 적었다. 구인 종이뭉치와 물풀을 내게 건네며, 동네 여기저기 사람들이  잘보게 전봇대와 벽에 붙여 놓으라 하셨다.  갱지뭉치담긴 봉지 흔들며 우리 동네 너머까지 광고지 붙인 효과가 난 건지 단번에 두 명의 젊은 여자들이 찾아왔다.

 여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앳된 그녀들은 중학생정도 되는 나이들이었다. 줄줄이 사탕처럼 자식 낳아 초등 공부조차 시키지 않고 돈 벌러 내치는 집안에서  온 두 언니들을 엄마는 안타까워하며 살뜰히 대했다. 일이 서툰 두 언니들  영 내키지 않아 하는 아버지를 다독이고 두 언니를 일하게 한 것도 엄마였다. 엄마는 두 언니 먹일 밥을 매일 더 준비하시고, 직원이 아닌 자기 친동생들처럼 대해  주며 기회가 되면 다시 학교에 가라고 다독였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우리 집보다 넉넉히 돈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생겼다며  공장일을 그만두는 언니들에게 엄마는 어디 가든 잘 살아라는 말로 그렇게 보냈다.

 몇 달 뒤 언니들은 그 당시 핫하던 과자 종합 선물세트를 들고 우리 집을 찾았다. 뽀송하던 피부는  허옇게 파운데이션에  묻혀있고, 도톰하니 물오른  입술은 시뻘건 루주에 덮여있었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와 요란한 옷차림에서  엄마는 단번에 언니들이 어디에 취직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열살도 안된 나는 술집 여자라는 말뜻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드라마에 간간히 나오는 대폿집에 한복 입고 젓가락 두들기는 아줌마들 정도 보아 온 내가 언니들의 직업을 알기는 만무했다. 

 언니들이 사 온 과자에 눈이 꽂힌 나는 과자봉지 뜯는 재미에 신나 있느라 방 한편에서 눈물지으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그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어슴프레 기억나는 것은  '잘 살 수 있다.' '잘 살아야 한다.'며 끊임없이 등을 토닥이던 엄마의 모습이다. 화려한 언니들은 또 놀러 오겠다며 인사를 했지만 이후 두 언니를 다시 본 적은 없다.

 가끔씩 언니들이 생각난다. 참 어린 나이였구나. 꽃봉오리 터질 곱고  귀한 나이에 돈 때문에  내쳐진 어린 인생이었다. 내 그때는 어려 알지 못해 뭐라 한 마디 거들지도 못하고 과자나 주워 먹는 철부지였으나, 이리 살아보니 엄마가 눈물짓던 이유도 알겠고 언니들이 나를 부러워한 이유도 알겠다. 내 언니들게 뭐하나 해 줄수 없지만, 그날 이후 다만 언니들 삶은 평안하셨고 평안하기만을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그 누군가의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