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리수리마수미 Mar 04. 2022

9월

1장 낌새

 가을이 되었음을 화면 너머 펼쳐지는 사람들의 긴팔  옷과 누렇고 붉게 물드는 자연에서 느낀다. 그렇게 화면을 통해 가을이 되었음을 알아차린 지 십여 년째이다.  


 내가 사는 곳은 여름만이 있다. 조금 시원한 여름, 무지막지하게 더운 여름, 온종일 비만 내리는 여름, 비 조차 오지 않는 여름으로 말이다. 이 정도를 구분하는  일도 최근에서야 가능해졌다. 그전에는 그저 매일 더운 여름나라로 느껴졌으나 살다 보니 여름에도 차이 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처음 이 땅을 밟던 날이 생각난다. 비행기 문이 열리 고 한 손에 캐리어를 끌며 사방을 돌아본 이곳, 예열  된 오븐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풍 기는 묘한 냄새로 데워진 공기는 긴 팔 셔츠를 어깨 까지 끌어올려도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끈적한 땀 에 절어 마중 나온 남편과 깊게 포옹하고 그가 머무는 숙소를 찾아가다 바라본 베트남은 80년대 내가 자란 동네와도 닮아 피곤함도 잊은 채 차창 밖을 한참  훑었다. 수많은 작은 골목들, 콘크리트 담벼락 위 깨 어진 병 조각, 평상같이 너른 곳에 삼삼오오 앉아있 는 할머니들, 그 앞을 뛰어노는 아이들, 슬레이트 지붕들, 철공소의 찌그러진 셔터 문, 붉고 노란 페인트 로 쓰인 간판들, 과자를 매달아 놓은 구멍가게 등등...  내 어릴 적 놀던 동네와 닮은 길들을 지나노라니 마 치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의 베트남 33 살이 가 시작되었다. 


 매일이 더웠다. 가져간 긴팔 옷들의 소매를 잘라내고  반팔이나 민소매로 만들어 입었다. 하루 종일 틀어 놓 은 에어컨 앞을 떠나는 법이 없었다. 가까운 거리도  에어컨 빵빵 틀린 차를 불러 움직이고 차에서 내리자 마자 시원한 쇼핑몰로 쏙 들어가는 삶을 살았다. 한국  마트 가서 장을 보고, 한국 방송만 찾아봤으며, 한국 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워 잠든 날, 꿈에서라도  만나면 잠에서 깨는 것이 원망스러워 한참을 울기도  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이 뜨거운 나라에 나를 불러 들인 남편이 밉기도 했다.  아마 몇 년은 우울감에 젖어 울기만 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 용기 내어 걸어 보기 시작했다. 먼지 가 득한 오토바이 부대들이 넘치는 도로도 걸어보고, 멀 리 가야 하는 날은 쎄옴(오토바이 택시)도 타본다. 로 컬 시장에 가 흥정하며 먹거리도 사오고, 시장 바닥  주저앉아 이름도 모르는 현지 음식들을 옆자리 앉은  이가 먹으면 따라 시켜 먹는다. 깔끔하고 세련되고 에 어컨 빵빵 켜진 한국 미용실이 아닌, 다 쓰러져 가는  간판에 여기저기 터져있는 소파가 준비된 주인장 미소만 좋은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다 내 머리를 다 녹여먹기도 한다. 베트남 로컬 병원에서 출산을 앞두 고 수술방에 남편이 함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현지 병원이었으나 통역을 한다는 명목하에 아이의 탄생을 온전히 함께 할 수 있었다. 집에 오토바이가 생기면서 주말마다 현지인들이 사는 골목길 사이사이를 누비며 드라이브도 한다.  


 어쩌다 십 년이라는 시간을 훨씬 넘어 이곳 생활에 젖어 살다 보니 이젠 여기 서도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tv 화면 너머 가을이 왔다고 알리지 않더라도 9월이 되면 긴팔 옷을 꺼내 입 는다. 더 시원해지는 12월이 되면 우리 집에 유일하게 있는 한 장 있는 극세사 이불을 덮고 자기도 한다.  바람이 더 부는 날은 전기장판도 살짝 켜본다. 3월이  되면 극세사 이불과 전기장판을 걷어 넣고 얇은 이불 들로 바꾼다. 커튼도 노란빛 도는 가벼운 재질로 갈아  단다. 7월의 뜨거운 여름에는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젖히고, 벽에 달린 선풍기도 죄다 켠 뒤, 통 얼음 띄 운 달짝지근 연유커피를 들이킨다. 그러다 기대하지  않던 소나기라도 오는 날이면 미리 사둔 부추전 굽고  시원한 맥주도 한 캔 딴다.  


 가을이 왔다. 내가 사는 이곳도 가을이 왔다. 이젠 계절이 바뀜도 느낄 만큼 오래 살았다 느꼈건만 우연히  켠 티브이 화면에 비치는 오색의 한국 가을 풍경은  눈으로 온몸으로 사랑하는 이들과 사계절을 느끼며  살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낸다. 찬바람 불면 털목도리 도 하고, 귀마개도 하고 털신도 신어보는, 봄이 오면  살랑거리는 시폰 치마 입고 분홍 꽃 흩날리는 길을  걸어보는, 가을이면 바닥에 떨어진 단풍도 주워 보는,  겨울이면 두 손 호호 불며 눈사람도 만들어보는 그런  계절을 느끼며 살고 싶다는 욕심이 사무치도록 든다. 


 어느새 하나 둘, 사계절 누리러 한국으로 떠나고, 여름 속 가을을 누리는 자들만 남은 2021년 호찌민의  9월을 맞이한다

작가의 이전글 단톡방의 분위기가 심상찮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