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낌새
가을이 되었음을 화면 너머 펼쳐지는 사람들의 긴팔 옷과 누렇고 붉게 물드는 자연에서 느낀다. 그렇게 화면을 통해 가을이 되었음을 알아차린 지 십여 년째이다.
내가 사는 곳은 여름만이 있다. 조금 시원한 여름, 무지막지하게 더운 여름, 온종일 비만 내리는 여름, 비 조차 오지 않는 여름으로 말이다. 이 정도를 구분하는 일도 최근에서야 가능해졌다. 그전에는 그저 매일 더운 여름나라로 느껴졌으나 살다 보니 여름에도 차이 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처음 이 땅을 밟던 날이 생각난다. 비행기 문이 열리 고 한 손에 캐리어를 끌며 사방을 돌아본 이곳, 예열 된 오븐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풍 기는 묘한 냄새로 데워진 공기는 긴 팔 셔츠를 어깨 까지 끌어올려도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끈적한 땀 에 절어 마중 나온 남편과 깊게 포옹하고 그가 머무는 숙소를 찾아가다 바라본 베트남은 80년대 내가 자란 동네와도 닮아 피곤함도 잊은 채 차창 밖을 한참 훑었다. 수많은 작은 골목들, 콘크리트 담벼락 위 깨 어진 병 조각, 평상같이 너른 곳에 삼삼오오 앉아있 는 할머니들, 그 앞을 뛰어노는 아이들, 슬레이트 지붕들, 철공소의 찌그러진 셔터 문, 붉고 노란 페인트 로 쓰인 간판들, 과자를 매달아 놓은 구멍가게 등등... 내 어릴 적 놀던 동네와 닮은 길들을 지나노라니 마 치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의 베트남 33 살이 가 시작되었다.
매일이 더웠다. 가져간 긴팔 옷들의 소매를 잘라내고 반팔이나 민소매로 만들어 입었다. 하루 종일 틀어 놓 은 에어컨 앞을 떠나는 법이 없었다. 가까운 거리도 에어컨 빵빵 틀린 차를 불러 움직이고 차에서 내리자 마자 시원한 쇼핑몰로 쏙 들어가는 삶을 살았다. 한국 마트 가서 장을 보고, 한국 방송만 찾아봤으며, 한국 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워 잠든 날, 꿈에서라도 만나면 잠에서 깨는 것이 원망스러워 한참을 울기도 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이 뜨거운 나라에 나를 불러 들인 남편이 밉기도 했다. 아마 몇 년은 우울감에 젖어 울기만 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 용기 내어 걸어 보기 시작했다. 먼지 가 득한 오토바이 부대들이 넘치는 도로도 걸어보고, 멀 리 가야 하는 날은 쎄옴(오토바이 택시)도 타본다. 로 컬 시장에 가 흥정하며 먹거리도 사오고, 시장 바닥 주저앉아 이름도 모르는 현지 음식들을 옆자리 앉은 이가 먹으면 따라 시켜 먹는다. 깔끔하고 세련되고 에 어컨 빵빵 켜진 한국 미용실이 아닌, 다 쓰러져 가는 간판에 여기저기 터져있는 소파가 준비된 주인장 미소만 좋은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다 내 머리를 다 녹여먹기도 한다. 베트남 로컬 병원에서 출산을 앞두 고 수술방에 남편이 함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현지 병원이었으나 통역을 한다는 명목하에 아이의 탄생을 온전히 함께 할 수 있었다. 집에 오토바이가 생기면서 주말마다 현지인들이 사는 골목길 사이사이를 누비며 드라이브도 한다.
어쩌다 십 년이라는 시간을 훨씬 넘어 이곳 생활에 젖어 살다 보니 이젠 여기 서도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tv 화면 너머 가을이 왔다고 알리지 않더라도 9월이 되면 긴팔 옷을 꺼내 입 는다. 더 시원해지는 12월이 되면 우리 집에 유일하게 있는 한 장 있는 극세사 이불을 덮고 자기도 한다. 바람이 더 부는 날은 전기장판도 살짝 켜본다. 3월이 되면 극세사 이불과 전기장판을 걷어 넣고 얇은 이불 들로 바꾼다. 커튼도 노란빛 도는 가벼운 재질로 갈아 단다. 7월의 뜨거운 여름에는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젖히고, 벽에 달린 선풍기도 죄다 켠 뒤, 통 얼음 띄 운 달짝지근 연유커피를 들이킨다. 그러다 기대하지 않던 소나기라도 오는 날이면 미리 사둔 부추전 굽고 시원한 맥주도 한 캔 딴다.
가을이 왔다. 내가 사는 이곳도 가을이 왔다. 이젠 계절이 바뀜도 느낄 만큼 오래 살았다 느꼈건만 우연히 켠 티브이 화면에 비치는 오색의 한국 가을 풍경은 눈으로 온몸으로 사랑하는 이들과 사계절을 느끼며 살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낸다. 찬바람 불면 털목도리 도 하고, 귀마개도 하고 털신도 신어보는, 봄이 오면 살랑거리는 시폰 치마 입고 분홍 꽃 흩날리는 길을 걸어보는, 가을이면 바닥에 떨어진 단풍도 주워 보는, 겨울이면 두 손 호호 불며 눈사람도 만들어보는 그런 계절을 느끼며 살고 싶다는 욕심이 사무치도록 든다.
어느새 하나 둘, 사계절 누리러 한국으로 떠나고, 여름 속 가을을 누리는 자들만 남은 2021년 호찌민의 9월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