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15박스, 계란 100판, 그리고 내 두 손

by 붕어빵숨니





제빵, 제과 기능사 자격증을 간신히 따낸 어느 날,
시끌벅적한 실습 시간,
훈련생들과 자유롭게 빵을 만들고 있던 그때였다.


스승님께서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따로 부르셨다.


한 손엔 대회 공문을 들고 계셨고,
내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며,
말없이 내밀며 천천히 입을 여셨다.



'지방장애인기능경기대회 제과제빵직종으로
한번 나가볼래?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처음엔 누구나 어려워.

안 해본 것도 많아도 연습만 충분히 하면 돼.

내 말대로만 하면 1등도 가능해.

잘 생각해 보고, 관심 있으면 말해.'



나는 공문을 손에 들고 눈을 동그랗게 굴리며,
천천히 읽었다.



'내가 대회 나가서 상을 받을 수 있을까?

그래도 뭐, 경험이라 생각하면 나쁘지 않지.

그래, 한번 도전해 보자.'




며칠 후, 스승님께 조심스럽게 말했다.



' 저....... 대회, 출전해볼게요.'



'좋아. 그럼 참가 접수하고,
하나씩 차근차근 가르쳐줄게.

그리고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돼.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고,
힘들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거든.

끝까지 해보자.'




그렇게 나의 첫 대회 준비가 시작됐다.




'그땐 몰랐다.
그래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워야 했다.'




제과제빵의 세계는 여전히 내겐 낯설고,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하나하나 새롭게 배우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방장애인기능경기대회 준비 기간은 딱 두 달.



그 안에서
나는 제과제빵사가 아니라
버터, 설탕, 크림, 초콜릿을 다루는
로봇이 되어갔다.


매일 똑같은 손놀림, 반복되는 작업,
'왜?'라는 질문조차 잊은 채.




케이크 아이싱 - '이건 그냥, 아주 지옥이야'



제일 먼저 배운 건 케이크 아이싱.


버터크림을 이용해
케이크 시트를 매끄럽게 바르는 작업이다.


겉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이 작업이야말로 가장 어렵고, 까다롭고,
점수 비중도 높았다.



시트 높이 > 정확한 직각 맞추기

윗면 크림 > 자국 없이 깔끔하게

형태 틀어짐 > 크림 걷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반복되는 실수에 좌절하고,
크림을 버리며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도 처음이기에,
남들보다 3배, 5배 더 연습했다.



스승님의 지적은 매번 같았다.



'다시, 다시. 좀 더 깔끔하게.

윗면이 왜 이렇게 울퉁불퉁해?
위에서 보면 완전 원모양이어야지.'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적과
혼나는 날들의 연속.


그 속에서
내 손도, 내 멘탈도
점점 단단해지고 있었다.




버터크림 장미 - '색은 예쁜데, 크림은 녹는다.'



두 번째 과제는 버터크림 장미.

핑크와 흰색, 두 색을 내어 투톤의 장미를 짜는 작업이다.


버터크림은 온도와 시간에 따라 금세 질어지고,
모양도 쉽게 흐트러진다.


색 배합 비율이 조금만 어긋나도
꽃이 탁하게 뭉개져서
매번 버리고, 새로 만들고,
그걸 일주일 내내 반복했다.


그 '경계'를 자연스럽게 물들이는 일.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초콜릿 플라스틱 - ' 장미꽃 만들기 지옥'



재료 : 초콜릿 100g + 물엿 30g


굳은 초콜릿 반죽을
손바닥과 손등으로 끊임없이 치대며 장미꽃을 만든다.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치대고,

한 잎, 세 잎, 다섯 잎...
총 아홉 장의 꽃잎이
비율 맞춰 겹쳐야 되고,

꽃잎 윗부분도 손으로 살짝 오므라지게끔 누르고
마치 '생화'처럼 살아있게 끔
제대로 된 장미가 완성된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에도 수십 송이
총 500송이 가까운 장미를 만들었다.


지금은 초콜릿 플라스틱만 봐도
고개부터 절레절레.
손끝이 기억하는 '지옥의 재료'였다.




마지팬 동물- '찰흙이야, 조소야, 제과제빵이야?'




호랑이, 사자, 강아지, 닭, 돼지....

무슨 동물이 나올지 몰라 다 만들었다.

색은 단 3가지
빨강, 노랑, 파랑.


이걸 섞어 필요한 색을 만들고,
누가 봐도
'어! 강아지다.'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그 순간만큼은
제과제빵 수업이 아니라
미술 시간 같았다.


어릴 적 찰흙 놀이하던 기억,
그리고 10년 가까이 다녔던 미술학원 덕분에
색 조합과 모양 만들기는 익숙했다.


스승님이 물으셨다.



'색 조합은 어디서 배웠어?'

'어릴 때 미술학원 10년 동안 다녔어요.'

'그래? 그럼 색 조합은 걱정 없겠네.
미술 배운 게 대회에 큰 도움이 돼.'



처음 듣는 스승님의 칭찬.
어색하고 낯설어서
웃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데코레이션 - '예쁘기만 하면 다야?'




대회 1개월 전,

직종 과제 주제는 '행복'이었다.


스승님이
작품 아이디어를 짜주시는 동안
나는 오직 '연습'에만 집중했다.



선 긋기,
데코레이션 파이핑 짜기,
버터크림 두께 일정하게 짜기,
매 순간이 집중의 연속이었다.



주제에 나온 '행복'이란,
케이크 작품성도 있어야 되며,
규정에 맞게끔
실수 하나라도 하면 안 되고,
모든 게 완벽해야겠다는
압박감이 서서히 몰려왔다.



주말도, 휴일도 없이
하루 종일 연습만 반복했다.


나는 제빵사가 아니라 로봇이었다.


주말에도 스승님은
내 연습을 확인하러 나오셨다.


미간을 찌푸린 채,
앵그리버드처럼 날 지켜보셨다.



그렇게 2개월


정말 길고, 또 참 길었던 시간이었다.


연습하는 동안
지금까지 써온 재료들만 봐도 숨이 턱 막혔다.


버터 4.5kg짜리 박스만도 15개.
계란 30알이 담긴 한 판을 100판 넘게 썼고,
밀가루는 4포대째 비워냈다.


하루하루 쌓여가는 포장박스와 계란 껍질들,
밀가루 먼지로 희뿌연 작업장에서
오직 나 혼자만이 묵묵히 움직였다.


고요했지만,
그곳은 내겐 가장 처절한 전쟁터였다.


하루하루 버터크림 냄새가 손끝에 배었고,
손가락 마디마다 알록달록한 색소가 묻어 있었다.


가운 소매와 앞치마엔
버터크림, 계란, 색소 자국이 무늬처럼 번져 있었다.


그 흔적들은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곳에 쏟아부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2개월 동안
혹독한 대회 준비 때문에
하루 수면 시간은 평균 3-4시간.


새벽까지 작업장에서 혼자 연습했고,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손에 힘이 풀릴 때까지
또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너무 졸려서
작업대 위에 엎드린 채 잠든 날도 있었고,
크림 묻은 앞치마를 그대로 걸친 채
기숙사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기숙사로 향하는 길,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고
발걸음도 무거웠다.


특히 어떤 날은
유독 연습이 안 돼서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이불속에서 소리 없이
펑펑 울기도 했다.


'왜 안 되지...
왜 이렇게 어렵지...'



그런 마음으로 눈물 젖은 베개에서
혼자 숨죽이며 울던 날도 있었지만,
그 눈물이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스승님의 단 한마디 때문이었다.



어느 날,
지친 얼굴로 작업장을 나서려는 나를 붙잡고
스승님이 조용히 말했다.



'수민아,
그동안 대회 연습하느라 고생했다.

많이 힘들었지?

내가 너를 국가대표 될 때까지 만들어줄게.'


그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다시 일어설 힘이 되었다.


그래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눈물을 닦고 작업장 불을 켰다.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아니, 진짜로 이루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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