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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Jun 04. 2018

푼타 아레나스: 겨울의 심장

여전히, 또 새롭게

20170716~20170718: Punta Arenas, Chile


고요하게 쏟아지는 함박눈. 남의 흔적이 없는 새하얀 눈밭. 정신을 깨울 만큼 차가운 바람. 갑옷처럼 껴입은 옷 속의 안정감.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사방에서부터 파고드는 온기. 추위를 잘 타는 주제에 좋아하는 계절을 꼽으라면 늘 겨울이라 답하는 나다. 북반구에서 여름이 무르익을 때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왔다. 적도에서 극지로, 대륙을 타고 여름과 가을을 통과해 남하하면서 자주 겨울 옷을 입었지만 햇살과 공기의 기운은 좀처럼 겨울 같지 않았다. 남미의 겨울을 파타고니아 지역에 들어서면서야 마침내 만났다.  


동면에 빠진 것만 같았던 푼타 아레나스 시내. 4사분면을 잘 보면 무지개가 보인다. 얼어 죽을 것 같은데 무지개가 귀여워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푼타아레나스, 칠레, 2017071


겨울과 적막


산티아고 공항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아침 일찍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에 도착했다. 공항에서부터 도시 규모가 느껴지기는 매번 마찬가지였다. 소담하고, 고요했다. 버스는 우리 숙소에 다다르기까지 시내 구석구석을 돌면서 사람들을 내려줬다. 비슷비슷한 모양새의 키 작은 주택들이 즐비했다. 그 어느 골목에서도 인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을 전체가 비수기의 기운을 내뿜는 듯했다.


사실 7월의 파타고니아, 그러니까 겨울 파타고니아는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비행기들과 주요 버스 노선이 거진 개점휴업을 한 상태였다. 여행자가 그만큼 없었다. 동행은커녕 여행 정보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안의 각종 트래킹 프로그램도 7월 한 달만큼은 문을 닫다시피 했다. 가려면 가이드가 있어야만 하는데 7월 산행을 하겠다는 가이드를 직접 찾아야 한다고 했다. 또 사나흘 남짓의 트래킹에 100만 원에 가까운 돈을 줘야 된단다. 일종의 생명수당이었다.


이곳의 파도 치는 모습이 유독 인상깊었다. 강풍이 쉼 없이 몰아치는 까닭인지, 짙푸른 융단에 주름이 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무지개! 푸에르토 나탈레스, 칠레, 2017071

숙소 투숙객도 나뿐인 것 같았다. 짐을 풀고 시내를 헤매기 시작했다. 모두가 겨울잠에 빠진, 얼어붙은 마을에서 혼자 깨어 돌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트래킹 하러 오는 국립공원에서 트래킹을 하기 힘들다니 쥐 죽은 듯한 분위기가 이해도 됐다. 이제부터 열흘간은 오롯이 혼자가 될 차례였다. 아르헨티나행 버스표를 사고 마트가 보이길래 장까지 보긴 했는데 뭘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외로움이 겨울바람과 함께 뼈마디로 파고들었다. 며칠을 왁자지껄하게 일행과 도시에서 지낸 직후라 유독 적적하고 쳐지는 데다, 도시 전체가 축 가라앉아 있으니 힘이 나질 않았다. 칠레용 심카드 데이터를 다 썼기 때문에 숙소 밖에서는 인터넷도 되지 않았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한국인이라면 다들 간다는 무한도전 신라면 집엘 가볼까 했는데 인터넷이 안 돼서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보이면 물어서라도 갈 텐데 인적마저 드무니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적막한 골목을 터덜터덜 걸었다. 걷다 보니 바다가 보였다. 마젤란 해협이었다. 바다 바로 앞까지 나아가 한참을 서서 먼 곳을 내다보았다. 수온이 시각화된 듯한 짙푸른 빛깔에 눈이 시렸다. 해변에서 새가 날았고, 수평선 멀리 무지개가 배어있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겨울 기운이 청량하니 좋았다. 안도감이 찾아왔다. 겨울과 바다, 내가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한가롭다는 게 잠시 외로움을 잊게 했다. 기나긴 여정 가운데 틈틈이 혼자 가라앉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꿈 같이 아득해 보였던 토레스 델 파이네. 여름에 와서 꼭 트래킹을 해 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토레스 델 파이네, 칠레, 20170717


산행을 바라다


비수기의 절정에 푼타 아레나스에 온 것은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을 돌아보는 하루짜리 투어가 여전히 가능하다고 해서였다. 봉우리 근처에도 못가는 어설픈 투어라지만 그렇게라도 토레스 델 파이네를 구경하고 싶었다. 오전 5시에 미니버스가 나를 데리러 오기로 했다. 일정을 안내하던 호텔 직원은 푼타 아레나스가 산티아고보다 한 시간이 빠르다고 주의를 줬다. 그걸 바닷바람과 외로움에 취해 깜빡 잊었다. 푼타 아레나스 시간으로 오전 5시 30분이 돼서야 일어나는 바람에 눈곱을 떼는 둥 마는 둥 하고 뛰쳐나갔다. 다행히 버스가 있었다. 가이드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껄껄 웃었다.

"시계 돌리는 거 깜빡했지? 그럴 줄 알고 다른 사람들 다 태우고 다시 와봤어."


빙하가 만든 밀로돈 동굴. 곰 같이 생긴 것이 밀로돈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 칠레, 20170717

산티아고에서 왔다는 남편과 아르헨 출신 아내, 브라질에서 온 중년부부, 혼자 온 칠레 소녀, 칠레 청소년 커플, 중년의 친구로 추정되는 여성 둘, 그리고 나까지가 이날 투어 멤버였다. 가이드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나는 그 버스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몰랐다. 가이드는 모두의 이름을 외우기가 벅찬지 출신 국가로 이름을 갈음했다. 나는 유일한 동양인이라 호명의 특혜를 입었다. 수민, 수림, 수린, 수리, 수미, 수니, 제 멋대로 변주해서 불렀지만 노력이 가상하고 정다워서 좋았다.


미니버스는 두세 시간을 달려 푸에르토 나탈레스와 밀로돈 동굴을 거친 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 들어섰다. 공원 안에서는 대체로 버스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었다. 종종 야생 영양들이 뛰노는 곳이나 토레스 델 파이 봉우리가 잘 보이는 곳, 그레이 호수의 상류 격인 폭포가 보이는 곳 등에 멈춰 서서 사진 찍을 시간을 줬다. 그때마다 쉰 살이 되기 전 어느 여름에 트래킹을 하기 위해 여길 다시 오고야 말겠다고 자꾸 다짐을 했다. 등산이 내켰던 적 없었고 높은 곳에서 차오르는 숨이 늘 버거웠던 나인데, 트래킹을 하지 않은 채 여길 논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공원을 노니는 사슴?들. 홀라당 타버린 풀과 나무들이 안타까웠다. 토레스 델 파이네, 칠레, 20170717


바람날아간다면


사실 파타고니아의 겨울은 걱정만큼 지독하진 못했다. 기온 자체가 한국의 겨울보다 높아서인지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다만 강풍만큼은 다른 세계의 것이었다. 유독 이날따라 바람이 거셌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입장권을 파는 초소에는 일기예보가 적혀있었는데 17일의 풍속은 80m/s. 앞 뒤의 다른 날과 견주어봐도 가공할만한 숫자였다.


바람 세기의 위엄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툭하면 선글라스와 모자 따위가 종이 쪼가리처럼 날아다녔다. 서로 바람에 날아가는 물건을 주워주기 바빴다. 가만히 서있기조차 힘이 들었다. 걸음을 옮기는 데는 엄청난 체력이 필요했다. 온몸의 근육에서 힘과 동작을 길어 올리는 수고를 했다. 왜 7월의 트래킹에 가이드들이 목숨 값을 받으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물감을 풀어도 만들기 힘들 것 같은 뽕따색 호수. 토레스 델 파이네, 칠레, 20170717

바람 때문에 힘겹게 뜬 눈을 어디로 돌려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절경이 펼쳐졌다. 광활한 대지와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싼 설산. 높이 솟아 그 어느 틈으로인가 계속 보이는 세 개의 바위 봉우리. 때때로 곁을 흐르는 청량한 강물, 강풍에 너울 치는 푸른 호수. 낮게 깔린 구름 더미. 유리조각처럼 투명하게 부서진 빙하의 흔적들. 가본 적은 없으나 묘하게 느껴지는 극지의 모습, 찬 겨울의 작품들. 마침내 그레이 호숫가에 이르러서는 겨울의 심장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듯한 확신과도 같은 착각에 빠졌다.


잠시 이대로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날아가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곧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의 걸작 앞에서, 또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져버렸기 때문이었을까. 이렇게 아름답고 드넓은 세상에서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내 길은 어디로 나 있는 건지 하릴없이 아득해졌다. 여행의 끝에선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여행을 하는 동안 아름다운 곳에 설 때마다 습관처럼 같은 번민이 찾아왔다. 절대의 아름다움과 순수 앞에서는 꾸밈없는 나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호수로 모여든다. 호수의 물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응축하고 있는 것일까. 토레스 델 파이네, 칠레, 20170717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Ultima Esperanza(마지막 희망).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이 속한 주(州) 이름이 눈 앞의 모든 것, 내 처지, 그리고 내 마음과 제법 어울린다는 생각. 전에도 그랬듯이 나는 겨울의 기운으로 충전됐고, 전과는 다르게 산행을 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됐다. 늘 좋았던 것이 그대로 좋았고, 뜻밖의 것도 나름대로 기뻤다. 나의 일부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서, 일부는 변할 수가 있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겪고 바라며 이룰 수 있을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변할 수도 있다는 것. 그 간극 어디에선가 희망이 비집고 나왔다. 견디기 힘들 만큼 불어오는 바람에 그제야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신비로운 빙하가 녹아 그레이 호수를 이뤘고 그 유빙은 호수가로 흘러왔다. 유빙은 제법 무거웠다. 토레스 델 파이네, 칠레, 20170717



#소소한 여행 팁

1. 산티아고와 푼타 아레나스 사이에 시차가 있다. 놀랍게도 같은 나라 안에 1시간 시차가 있다. 숙소에서 분명 주의를 주었는데 제때 시계를 바꿔두지 않아서 허탕을 칠 뻔했다.

2. 토레스 델 파이네 일일 투어는 비수기에도 가능하다. 새벽 일찍 시작해 저녁 무렵 끝나는 여정이다. 묵는 숙소에서 조율해준다.

3. 겨울이라 그런가 싶다가도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안의 풀들이 너무 죽어있는 게 의아했는데 수년? 수십 년 전 이스라엘 여행객이 담뱃불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국립공원이 홀랑 탔다고 한다.

3. 7월 한 달 간은 푸에르토 나탈레스-엘 칼라파테 간 직행 버스가 사라진다(그때뿐이었는지, 매년 그런 건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동선 효율을 위해서라면 산티아고-(푼타아레나스)-푸에르토 나탈레스-엘 칼라파테 순으로 이동하는 게 나은데 버스 사정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4. 엘 칼라파테 린다 비스타 호텔 사장님 덕에 우회 버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푼타아레나스에서 아르헨티나 리오 가예고스로 가는 버스를 탄 뒤 다시 리오 가예고스에서 엘 칼라파테 하아 버스를 타는 방법이다. 아무것도 없는 리오 가예고스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당시에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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