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벽을 넘어 모험을
날이 흐렸다.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은 궂은날이라서 빙하의 푸른빛이 더욱 아름다울 거라고 했다. 이윽고 멀리 반짝이는 빙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꽁꽁 얼어붙은 소다맛 아이스크림 같았다. 영혼을 빨아들이는, 짜릿할 정도로 청량하게 푸른 그 빛깔에 금방 매혹되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갑판 위를 떠날 수가 없었다. 배는 차츰 빙하를 향해 나아갔다. 빙하도 아주아주 서서히,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을 것이었다. 페리토 모레노(Perito Moreno) 빙하는 아르헨티노 호수를 향해 매일 조금씩 전진한다. 빠른 날에는 하루에 2m씩.
배가 멈춰 섰다. 60m 높이에 폭 5km, 거대한 얼음 장벽이 설산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압도적이었다. 깊은 푸르름 속에 세월이 켜켜이 얼어붙어 있었다. 수만 년 전에 내렸던 눈이 쌓였다가 녹고, 또 얼기를 거듭하며 빙하가 되었다. 숭고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이었다. 커다란 유람선도, 길어야 백 년을 살 사람들도 이 앞에선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같았다.
Wonderwall. Oasis의 곡이 떠올랐다. 첫사랑으로부터 각인된 노래, 6년 가까이 내 휴대폰 통화 연결음이었던 노래다. 첫 번째 사랑이 지나가고 나는 몇 번 더 사랑을 했다. 사랑은 매번 이 노래 제목 같았다. 분명 경이로움이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쌓아 올린 견고한 벽, 거기 기대어 전에 알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맛보는 기쁨.
Because maybe
You're gonna be the one that saves me
And after all
You're my wonderwall
하지만 타인이라는 벽은 매번 한계를 드러냈다. 맞닿은 채 아무리 마모된다 해도 결국 그 자체로 벽일 뿐이라서였을까. 노래 가사와는 달리, 우리는 끝내 단 한 번도 서로를 구원하지 못했다. 인간 사이의 사랑은 한결같이 좌절을 내포하고 있었다.
지나간 사랑을 반추하며 먹먹해진 마음으로 불현듯 굉음이 파고들었다. 현실의 것이 아닌 듯한 깊고 낮은 울림이었다. 응축된 시간이 예고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고작 한 귀퉁이가 허물어졌을 뿐인데 무엇인가가 영원히 끝나버렸다는 걸 직감하게 하는 소리가 났다. 바스러진 빙하의 조각들, 그러나 내 몸뚱이보다도 거대할 그 잔해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하늘색 물속으로 녹아들었다. 파장이 금방 사그라들었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호수는 다시 잔잔해졌다.
당신들과 나의 벽도 어쩌면 사랑이 끝난 뒤에 아주 조금, 허물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불시에. 각자의 삶과 감정이 응축된 그 조각들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서로에게 녹아들어서 내 안을, 또 당신의 안을 원래의 자리인 것처럼 유유히 흘러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완전한 모든 사랑이 끝에 이르러서야 그런 방식으로 완전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곧 모호하기만 했던 wonderwall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 여행을 떠나오면서야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던 서로에게 참 지난했던 사랑에도, 진심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호수 위를 떠다니는 얼음 조각들을 내려다보면서. 마침 정오가 지나고 날이 개기 시작했다. 빙하의 푸른빛은 햇살을 따라 천천히 하얗게 사그라들었다.
엘 칼라파테(El Calafate)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베이스캠프다. 푼타 아레나스보다는 한결 정돈된, 부유한 은퇴자들의 마을 같은 곳이었다. 새벽 늦게 도착한 4인용 호스텔 방에 룸메이트는 콜롬비아에서 온 T 뿐이었다. 그는 직업을 영어로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는가 싶더니 신분증 같은 걸 내밀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기획재정부에서 일하는 변호사였다. 우리는 힘겹게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그만두고 여행을 왔다고 하니까 그는 갑자기 유창하고 빠른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Are you crazy?"
급소에 비수를 맞은 기분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남미에 온 한국인들은 대개 미쳐있었다. 모레노 빙하 투어에는 M언니, J언니, 그리고 린다비스타 호텔 사장님 딸 Z가 함께했다. 여기서 나고 자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Z만 빼면 T의 말마따나 나머지가 모두 (일자리를 내팽개치고 떠나온) 미친 사람들이었다. 언니들도 딱히 다음에 뭘 할지는 정해두지 않았다고 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교회 친구라던 두 언니는 부산 사투리 억양이 담긴 목소리로 경쾌하게 말할 뿐이었다.
"뭐 먹고 살 거는 있겠지, 안 그나?"
M, J언니의 지난 도시 일행이자 나와 엘 칼라파테부터 우수아이아까지를 함께한 J오빠도 마찬가지 처지였다. 여행인 동시에, 인생의 다음 목적지를 찾아 심리적인 모험을 떠나왔다는 점에서 그랬다. J오빠는 프로그래머다. 5년만 다니고 그만두겠다고 내내 생각했는데, 그보다 조금 더 일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만둔 뒤에는 1년이 조금 넘게 여행을 했다. 그의 여행은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J오빠는 여행을 하는 동안 한국에 가서 다시 비슷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그렇게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흔들리며 고심했을지 어렴풋이 짐작이 돼서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까. 결론이라는 게 있긴 할까. 1년 정도 더 떠돌아다니면 다른 결론을 지을 수 있을까.
500년 전 모험을 떠나온 항해가 마젤란이 이 지역에 처음 다다랐을 때 그가 타고 온 배에 구멍이 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구멍을 막기 위해 이 지역에 즐비한 어떤 나무를 사용했다. 검붉은 베리가 열리는 나무였다. 그 나무에 마젤란은 칼라파테라는 이름을 붙였다. ‘벌어진 틈을 막다’라는 뜻의 스페인어 동사 'calafatear'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모험담이 세대를 걸쳐 전해지면서 칼라파테 열매를 먹으면 다시 엘 칼라파테로 돌아올 수 있다는 낭설도 생겨났다.
어떤 결론을 얻든지, 언젠가는 다시 여기로 돌아오고 싶었다. 다음번에는 여름에 찾아와 페리토 모레노 빙하 위를 걷는 트래킹을 하고 싶었다. 그때엔 모험이 아닌, 온전한 여행이어도 좋을 것 같았다. 지금과는 또 다른 마음의 방랑을 끌어안고 떠나오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마을과의 재회를 염원하며 아이스크림 맛집에 가서 칼라파테 맛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빙하 크림(crema del glaciar)'이라는 이름이 붙은 하늘색 아이스크림도 함께 먹었다. 빙하에서는 바닐라 맛이 났다.
#소소한 여행 팁
1. 비수기에는 아르헨티나 국내선 비행기도 옵션이 하나뿐이다. 아르헨티나항공. 우리나라로 치면 대한항공 같은 거라서 가격이 비싸다. 국내선인데 한 구당 30만 원씩도 나온다.
2. 아르헨티나항공은 대한항공이랑 같이 스카이팀 소속 항공사이기도 하다. 생돈 다 내고 끊기엔 너무 비싸므로 가족 마일리지를 동원해서라도 대한항공 마일리지로 표를 끊는 게 가장 똑똑한 방법이다.
3. 엘 칼라파테-우수아이아-부에노스 아이레스-푸에르토 이과수로 이어지는 3 구간 이동을 마일리지로 발권했다. 총 25000마일이 들었다.
4. 대한항공 웹사이트에서 1:1 채팅 기능을 이용하면 직원을 통해 직접 예약할 수 있다. 예약 후 24시간 내에 대한항공 지사를 직접 방문해 발권해야 한다. 시청 지사로 가거나 삼성역 도심공항으로 가면 된다.
5. 아르헨티나 현금 출금은 최악이다. 특히 엘 칼라파테가 그랬다. 출금할 때마다 한화 7000원가량의 수수료가 붙는데 한 번에 인출할 수 있는 돈이 쥐꼬리만큼이다. 게다가 비수기여서 그런지 ATM에 제때 돈이 수급되지 않았다. 첫날 아침 은행 4곳을 돈 끝에 간신히 돈을 뽑았다.
6. 모레노 빙하를 포함해 Parque Nacional Los Glaciares 국립공원 곳곳을 둘러보는 투어는 빙하 트래킹이 중단되는 7월에도 운영된다. 아침 일찍 출발해 저녁 시간 전에 돌아오는 코스로, 점심 요깃거리를 챙겨가야 한다.
7. 빙하가 대규모로 붕괴되는 주기는 원래 3~4년이라고 한다. 최근 들어 그 주기가 2~3년 정도로 짧아졌다. 여름철 둥글게 동굴 모양으로 파였던 빙하의 한쪽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게 대규모 붕괴. 그저 한쪽 끄트머리가 살짝씩 무너지는 건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다고 한다.
8. 지금 속도로 온난화가 계속된다면 반세기 내에 모레노 빙하가 사라질 거라는 절망적인 전망도 있다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