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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Jul 30. 2018

우수아이아: 끝과 시작

어떤 반환점

20170721~20170723: Ushuaia, Argentina

  

우스꽝스러울 만큼 선언적이다. ‘세상의 (Fin del Mundo)’이라는 별명. 세상을 모든 방향으로 한계 없이 확장시키는 시대에도 여전히 그런 별명을 내세우는 도시라니. 별명 때문에 어떻게든 무엇인가의 기점이어야  것만 같은 . 발음이 쓸쓸한 이름을 가진 아주  곳의 차가운 . 우수아이아는 그런 곳이었다. 남미 대륙에 들어선 지    만에 마침내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 도착했다.  

  

아침 산책길. 기운 채 버려진지 오래된 배 앞에서 시간이 멈춘 듯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었다. 20170722,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아침에 취하다


하늘과 맞닿은 설산의 끝자락마다 게으른 햇살이 스며들었다. 세월의 겹으로 쌓인 눈들이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아침의 시작이었다. 하루가 아까워 서둘러 거리로 나섰다. 배들이 겨울잠에 빠진 것처럼 잔잔한 수면에 기대어 정박하고 있었다. 눈 덮인 산의 밑뿌리부터 거의 물가에 이르기까지 원색의 집들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산과 배와 집들이 고스란히 비글해협의 수면 위로 투명하게 반사돼 일렁거렸다. 날아오르는 물새들만이 적막을 깼다. 사방이 아름다워서 제자리에  채로 몇 번을 빙글빙글 돌았다. 나의 허다한 허물이 씻겨 내려가는  같았다.  


세상의 끝에서도 자물쇠로 사랑을 걸어잠그고 시베리아허스키같은 동네 똥개는 유유히 거리를 누볐다. 20170722,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수년 전 남미를 6개월간 여행한 친구 C는 내가 우수아이아에 있다는 얘길 듣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을 거라고 거듭 말했다.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을 보러 가는 대신 이 조용하고 작은 동네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세상의 끝 박물관을 둘러보고, 시내의 상점들을 구경했다. 그저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는 C는 딱 한 가지를 추천했다. 100년도 더 된 카페 El Almacen de Ramos Generales에 들러 초코무스를 먹을 것. 거기 홀로 앉아 초코무스와 라떼를 마시며 정체가 없는 문장들을 끄적였다. 문득 C가 사실 오래전에 나보다도 더 어른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0년을 견딘 작은 카페. 소품 하나하나에 깃든 역사가 인상적이었다. 20170722,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탐험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세상의 (El Fin del Mundo)’이라고 적힌 표지판 앞에 섰다. 세상의 끝이라는 별칭은 낯선 산보객을 한없이 묘한 기분에 젖어들게 했다. 신대륙의 남쪽 , 그래서 세상의 끝이라 여겨지던 . 마침내 끝을 보았다는 생각에 기뻤을까, 더 이상  곳이 없어서 낙담했을까. 여길 끝이라고 정의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그로 인해 사라져 간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탐험가들이  땅에 발을 디디면서 원주민들에게 끝이 찾아왔다. 현존하는 마지막 순수 혈통 원주민은   , 크리스티나뿐이다. 


세상의 끝에 놓인 이정표와 방향계,  그리고 세상의 끝을 외치는 간판. 20170721~20170722,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세상의 끝이라는 별명이 곱씹을수록 묘한 까닭은 우수아이아가 사실 시작의 도시이기도 해서 그렇다.  도시의 항구는 얼음 대륙, 남극으로 가는 관문이다. 숱한 탐험이 여기서 끝났고,  여기서 시작됐다. 원주민들의 언어와, 문화와, 생활이 끝나자 새로 촌락이 들어섰고 또 다른 삶들이 시작됐다. T.S. Eliot(엘리엇)  ‘Little Gidding’ 떠올랐다.  

  

What we call the beginning is often the end
And to make an end is to make a beginning.
The end is where we start from.  
우리가 시작이라 칭하는 것이 대개 끝이고
끝을 맺는 일은 시작을 여는 일이다.
끝은 곧 우리가 출발하는 곳.


모든 끝은 필연적으로 시작을 품고 있다. 태생적인 역설이다. 머리로는 그걸 알았다. 마음이 문제였다. 모든 방면에서 내겐 언제나 끝이 시작보다 어려웠다. 두근거림과 의지, 결심과 계획들이 온갖 시작을 추동했지만, 미련과 회한과 나약함이 반작용처럼 매번 끝에 매달려 다른 시작을 방해했다. 다 던지고 이 여행을 떠나올 때도 그랬다.  

  

We shall not cease from exploration
And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place for the first time.
우리는 결코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모든 탐험의 끝은
시작했던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리니
그때 처음으로 그곳을 알게 되리라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이곳을 핑계 삼아 여러 가지를 제대로 끝내고 시작하고 싶었던  같다. 어긋난 , 해묵은 관계, 나쁜 습관, 오래 미뤄둔 , 준비된 마음. 그래서 많은  포기하면서도 무리한 일정을 잡아 남쪽으로 남쪽으로, 필사적으로 내려왔다는  인정하지 않을  없었다. 세상의 끝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바라보면서 끝내 후련했다. 끝을 시작하는 기분으로,  시작을 끝내는 기분으로 가만가만 땅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엽서를 샀는데 공휴일에 접어드는 바람에 한국에 돌아와서 줬다는 슬픈 이야기. 길거리 귀여운 펭귄. 배에서 돌아본 풍경. 20170721~201722,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슬픔 묻고 돌아서

  

우수아이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도 끝이 났다. 왕가위의 영화 <해피투게더> 덕분이다. 주인공 아휘(양조위) 지구  바퀴를 돌만큼 깊고 지난했던 보영(장국영)과의 사랑을 지구 최남단의 에클라이레우스 등대(Faro Les Eclaireurs)에서 끝낸다. 등대에 슬픔을 내려둔 그는 다시 지구  바퀴를 돌아 제자리를 찾아간다. 나도 아휘가 슬픔을 묻었던  등대에 이런저런 슬픔을 묻기 위해 비글해협 투어를 했다. 유람선을 타고 가마우지나 물개들이 뒤덮인 섬들을 둘러보다가, 섬에서 짧은 트래킹을 하고 등대에 들리는 코스로 구성된 투어였다.  


비글해협 투어 나가는 길. 가마우지 는 펭귄인 척 하는 새였고, 새라서 무서웠다. 트랙킹하다가 주운 예쁜 열매. 20170722,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비글해협의 물결은 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빛이었다.  한가운데에 조그마한 바위섬이 있었고, 슬픔의 등대는 거기 덩그러니 서있었다. 작고 빛이 바래 조금은 초라한 등대였다. 막상 등대에 다다르자  슬픔을 어떤 방식으로 거기 두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연구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갖가지 슬픔들을 하나씩 명명했다. 쉽지 않은 삶, 지나간 사랑, 기자를 하는 동안 감히 내 것처럼 마음에 눌어붙었던 여러 죽음들, 도달하지 못한 위로, 바꾸지 못한 세상, 깨어진 꿈, 불안한 내일 같은 것들.


인사를 건넨  바닷바람에 그것들을 흘려보냈다. 이토록 손쉽게 지난 슬픔과 영영 작별할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가슴은 차츰 가벼워졌다. 아휘가 여기서부터 다시 먼 길을 돌아 슬픔의 다음을 만들어갔던 것처럼, 나 역시 뚜벅뚜벅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등대는 지구 최남단의 등대라는 이름의 무게에 걸맞지 않게 왜소했다. 20170722,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해가 지고 뱃머리가 우수아이아 항구 쪽으로 돌아섰다. 앳된 선원은 커피를 가지고 직접 만들었다는 독주를 승객들에게 돌렸다. 겨울 바닷바람에 얼어붙었던 몸이 사르르 녹았다.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은 밤하늘과 수면 위를 동시에 수놓으며 별처럼 반짝거렸다. 이번 여행에서  해야만 했던  하나를 해치웠기 때문에 금의환향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살면서 한 번쯤 더 여기 슬픔을 묻으러 올 수 있을까. 다음번엔 남극에 가는 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피투게더 삽입곡을 들으면서 보자. 20170722,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도시에 돌아와서는 호스텔 사람들과 즐거운 저녁을 보냈다. 아래층 침대를 쓰는 콜롬비아 뮤지션은 첫날 나를 보자마자 전통 춤을 추자고 했었다. 부끄럽고 머쓱해서 손사래를 쳤는데 이날은 달랐다. 우리는 음악도 없이  해괴한 전통춤을 엉망진창으로 신나게 췄다. 사람들과 어울려 킹크랩을 먹고, 시답잖은 얘기를 했으며, 동네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  속어를, 나는 한국에서 쓰는 속어를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웠다. 어제도 내일도 기약 없이  순간만큼은 모두 친구가 되었다. 슬픔은 거기 없었다.  


해지는 우수아이아와 내가 해체운 킹크랩. 살아있을때의 모습도 봐놔서 미안했다 약간. 20170722,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소소한 여행 팁

1. 우수아이아는 파타고니아에서 물가가 제일 비싼 것 같았다.

2. 파타고니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우수아이아의 겨울은 비수기가 아니다. 기막힌 슬로프를 자랑하기 때문에 겨울에 스키랑 보드 타는 사람들의 천국이 된다. 우리 호스텔에도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슬로프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3. 비글해협 투어에서 비수기가 아닐 때는 펭귄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침에 출발하는 배가 있고, 점심때 출발해 해 지고 돌아오는 배가 있다.

4. 예전에는 섬에 내려 등대를 둘러볼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아니다. 유람선 여러대가 섬을 빙빙 돌아 구경한다. 사실 슬픔을 내려놓는 감정에 몰입하기에 좋은 여건은 아니다.

5. 킹크랩을 파는 가게들은 마을의 메인 골목에 줄지어 있는데 가게마다 가격이 비슷비슷했다. 그냥 사람들이 많이 앉아있는 곳에 들어가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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