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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Jun 13. 2018

리오 가예고스: 떠돌며 생각하다

장보기와 거리의 개들

20170718: Río Gallegos, Argentina


다시 국경을 넘는 날이었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로 가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리오 가예고스에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했다. 리오 가예고스 버스 터미널에 오후 4시가 조금 안 돼서 도착했다. 터미널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초라한 곳이었다. 터미널 앞에는 터미널보다 커다란 카르푸가 있었다. 다음 버스를 타려면 다섯 시간은 더 버텨야 하므로, 터미널보다 카르푸에서 떠도는 게 낫겠다 싶었다. 놀이동산 가기 전날 밤, 무슨 놀이기구를 어떤 순서로 탈 것인가 번뇌하듯 비장한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리오 가예고스로 향하는 버스. 달려도 달려도 비슷한 풍경들. 20170718


보는 여행자


여행 중에 장을 보는 일은 조심스럽고 어설프다. 장보기라는 행위가 생활의 토대라서다. 일상을 떠나온 뜨내기는 며칠 간의 생활만을 계산해 조금 다른 기준으로 물건을 고른다. 유한하고 나약한 토대를 세우는 것이다. 우선 커다란 카트 하나를 밀고 슬슬 바닥을 드러내는 생필품들을 담았다. 치약, 수분크림, 바디로션. 저녁 주전부리와 이튿날 점심으로 먹을 것들도 챙겼다. 겨우 한 시간이 흘렀다. 미술관의 회랑을 걷듯이 복도를 다시 차례로, 꼼꼼히 누볐다. 비누 따위가 거장의 미술작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진열된 상품 하나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렇게 물건을 고르다 보니 두고 온 일상에 대한 애틋함이 피어올랐다. 다리는 아프고 마음은 말랑말랑해진 채로 카트를 세워두고 사람 구경을 시작했다. 이 도시에서 생활을 꾸리는 사람들, 그러니까 진짜로 장을 보는 사람들의 일상을 관람했다. 곰인형을 사 달라고 아빠를 조르는 꼬맹이가 있었고 채소 이파리를 꼼꼼히 뜯어보는 할머니가 있었다. 카트를 커다란 생수와 두루마리 휴지, 와인 등으로 꽉 채운 커플도 있었다. 무료해서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장을 보러 간 게 언제였는지를 더듬어봤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살기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엄마, 아빠가 내 몫까지 묵묵히 해오셨을 테다. 가슴이 저릿거렸다. 모처럼 집에 널브러져 쉬면서도 장 보러 가는 엄마 등 뒤에 대고 필요한 것만 읊곤 했던 숱한 날들이 떠올랐다. 가족들을 위해 자주 혼자 물건을 고르고 싣어날랐을 가냘픈 엄마 몸이 눈에 선했다.


보고 싶었다.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싶었다. 미안하고 속상함보다 그리움이 배로 컸다. 장 보는 엄마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과자 사달라고 칭얼대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엄마랑 꼭 장을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오래오래 엄마랑 같이, 엄마를 위해 장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신께 짧은 기도를 했다.


배가 젖은 누렁이. 20170718, 리오 가예고스, 아르헨티나리마, 페루/ 마추픽추, 페루


정처 없이, 여유롭게


실컷 쇼핑을 하고 터미널로 돌아왔는데 겨우 오후 6시였다. 터미널의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바꿔가면서 시간을 죽였다. 그 사이 버스가 끊임없이 오고 갔다.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서로를 맞고 보냈다. 장을 보다가 일상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버린 기분이 제법 거세진 빗줄기와 함께 축축 가라앉았다.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누렁이 하나가 비를 피해 터미널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흙탕물에 웅크렸었는지 배에만 시커먼 물이 든 채였다. 개는 한 번도 짖지 않고 터미널 곳곳을 배회하다 한 곳에 옹송그리기를 반복했다. 축 처진 눈망울에 살랑거리는 꼬리가 처량하고도 사랑스러웠다. 젖은 채 떠돈다는 점에서는 카르푸 안에서 멀뚱거리던 내 모습 같기도 했다.


각종 주인 없는 개들. 1사분면부터 마추픽추, 페루/ 리마, 페루/ 엘 칼라파테, 아르헨티나/ 코파카바나, 볼리비아

돌이켜보니 남미에는 주인 없는 개가 유독 많았다. 그 개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순했다. 거리의 제자리 아닌 제자리와 사람의 자리를 가리지 않고 불쑥 뜻밖의 장소로까지 파고드는 습성도 같았다. 터미널 안이나, 레스토랑 테이블 옆 같은 곳들로. 그럼에도 쫓겨나거나 외면당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개들을 있는 그대로 두었고 자주 곁을 내줬다.


정해진 곳 없이 떠도는 개들의 여유가 좋았다. 소속 없는 생물들에게도 박하지 않은 사람들 마음의 틈 역시 참 좋았다. 문득 그 개들과 이곳 사람들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란하지 않으나 거리낌도 없이, 낯선 곳에 스며드는 여행자로 다니고 싶었다. 내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서는 일상을 스치는 모든 존재들을 그대로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의식이 그렇게 흐르자 마트에서부터 따라붙었던 울적함이 차츰 가셨다. 누렁이는 어느덧 내 발치에 엎드려 있었다. 아까 산 빵 봉지를 열어 두 개를 꺼내들었다. 하나를 누렁이 앞에 내려놓았다. 까만 코로 두어 번 킁킁 거리던 누렁이가 빵을 먹기 시작했다. 나도 손에 든 빵을 베어 물었다. 두 떠돌이의 조촐한 저녁 식사였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각자 다시 길 밖으로 나아갈 채비를 했다.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소소한 여행 팁

1. 리오 가예고스 터미널 안에 와이파이를 쓸 수 있는 카페 겸 식당이 있기는 하다. 1층에 있는 카페보다 2층 것이 낫다.

2. 큰 짐을 맡길 수 있는 짐 보관소도 있다. 여기 짐을 맡기고 카르푸로 쇼핑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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