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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Aug 27. 2018

부에노스 아이레스: 측벽(側壁)과 무대

사랑에 빠지지 않더라도

20170723~20170725: Buenos Aires, Argentina


푼타 아레나스에서 엘 칼라파테, 우수아이아에 이르기까지, 땅의 남쪽 끄트머리에 얼어붙은 적막에서 비로소 빠져나와 다다른 곳은 다시 도시였다. 남미의 파리라 불리는 곳, 부에노스 아이레스. 5~6년 전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이라는 영화를 봤다. 원제는 <Medianeras>, 측벽(側壁).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도시와, 그 도시의 수많은 벽 너머에서 부서진 채 살아가는 두 현대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 끝에서, 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야겠다고 결심을 했었다.


도시의 오벨리스크, 측벽을 떠올리게 하는 아파트들, 노란 문이 귀여운 지하철, 부촌으로 향하는 여인의 다리, 도로의 그래피티. 20170724~25,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도시 사이로


첫날 아침 일찍 거리로 나서자, 예언을 이룬 듯한 기분이 든 것은 그래서였다. 거리를 걷다가 세계 3대 극장이라는 ‘콜론 극장(Teatro colon)’에 들러 가이드 투어를 들었고, 극장을 개조해 만든 커다란 서점 ‘엘 아테네오(El Ateneo Grand Splendid)’에서 시간을 죽였다. 열흘 전에 썼지만 부치지 못한 엽서 몇 장을 지구 반대편으로 보냈다. 지하철을 탔고, 혼자 스테이크를 먹었다. 드높은 빌딩들, 그레코로만 양식의 국회의사당, 아주 오래전 지어진 게 분명한 무명의 건물들도 보았다.


미적 불규칙성, 윤리적 불규칙성, 프랑스식 건물 옆에 정체 모를 건물, 수천 개의 빌딩이 하늘 높이 솟은 곳.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두서없는 이 건물들은 실패한 도시 계획의 산물이다.
우리네 인생처럼. 어떻게 만들고 싶은지 알지 못한 거다.
우린 이곳에서 뜨내기처럼 산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2011)


콜론극장의 겉과 속, 보르헤스 기념 간판, 서점이 된 극장, 주행하지 않는 배, 오래되 카페, 20170724,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나는 거리에서 꽃을 파는 할아버지의 거친 손끝을 오래 물끄러미 보았고, 서점 구석에서 책에 푹 빠져 있는 아이의 기다란 속눈썹에 오래 시선을 두었다. 지하철로 향하는 직장인들의 잿빛 얼굴, 연인들의 얼굴에 매달린 미소도 보았다. 그렇게 눈에 든 장면 하나하나가 참 좋았다. 사람 구경을 해 본 기억이 까마득했다. 일을 시작한 뒤로는 일이 아닌 이유로, 목적을 갖지 않고 거리의 타인들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수년 전 그 영화는 도시가 고독을 부추긴다고 이야기했다. 거기 눈멀어 곁은 보지 못하고 월리를 찾다가 엇갈리는 사람들과 인연들에 대해 말했다. 남을 향해 창을 내고 마음의 공간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삶은 풍요로워지는 것인데 참 오래 잊고 지냈다. 다시 나의 도시로 돌아가 새 일상을 얻게 된 뒤에도 자주 여행하듯 주변을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꽃 파는 할아버지, 국회, 지하철역, 대통령궁. 도시의 얼굴들. 20170724~25,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영원히 추는 춤


도시를 만끽하는 가운데 계획한 단 한 가지는 라 보카(La Voca) 지구에 가서 탱고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 발원지인 라 보카에서 보는 탱고가 시내의 고급 공연장 춤보다 제 맛이 날 것 같았다. 라 보카 지구가 치안이 엉망인 빈민촌에 있어 혼자 다니긴 어렵다기에 동행을 구했다. K언니였다.


우리가 라 보카의 중심지 카미니토(Caminito)에 도착하자마자 흐리던 하늘이 맑게 개었다. 형형색색 칠해진 벽들이 햇살을 받아 한층 선연한 빛깔을 드러냈다. 우리는 곱게 칠한 벽들과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다가 골목 끝의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탱고 공연이 시작될 참이었다. 피자와 와인을 시키고 몸을 무대로 돌렸다. 민망할 만큼 아주 작은 무대였다. 사장은 문 앞에서 호객 행위에 열중했고, 손님들은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카미니토로 가는 길. 남미의 동네 축구 바이브가 놀라웠고, 알록달록 벽들이 눈부셨다. 20170724,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두 무용수는 주변을 개의치 않고 객석 아닌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한 뒤 무대에 올랐다. 조악한 스피커를 통해 선율이 흘러나오자 두 사람의 발끝이 바닥을 끈적하게 쓸었다. 서로에게, 때로는 허공을 향해 뻗는 손가락 마디마디에 최선이 깃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비장하고 단호한 두 무용수의 눈빛에서 탱고의 혼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들을 춤사위를 지켜보면서 나는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주어진 여건을 탓하느라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나의 무대에 감사할 줄 몰랐던 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탱고가 처음 생겨났을 때 사람들은 이 춤을 ‘바일리 꼰 꼬르떼(baile con corte)’, ‘멈추지 않는 춤’이라 불렀다고 한다. 라 보카를 터전 삼았던 이민자들의 한과 슬픔, 가난과 역경은 세월의 힘으로 농축되었고, 오늘도 크고 작은 무대 위를 수놓는다. 결국 영영 그치지 않는 몸짓이 된 셈이다. 무대의 규모와 상황, 관객의 반응을 따지지 않고 오직 춤에만 몰두할 줄 아는 사람들 덕분일 터였다.


마치 다른 세계에 놓인 것처럼 춤추던 두 사람. 카미니토 거리 모습. 20170724,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각자 무대


K언니와 나는 탱고가 끝난 뒤 거리를 누비며 지난 삶과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이 도시에서 일하게 된 남편을 따라 이사를 온 지 한 달이 채 안 됐다고 했다. 회사를 다니다가 작은 언론사 기자로 일했는데, 한창 일에 재미가 붙을 때 한국을 떠난 게 못내 아쉬운 듯했다. 그는 홀로 긴 여행을 하는 내가 부럽다면서도, 낯선 이 도시 밖의 더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이 한편으론 두렵다고 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가 무서운 여행자였기에 K언니가 부러웠다. 사랑하는 사람과 제법 낭만적인 도시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다시 공부를 한다니.


나는 K언니에게 이곳에서만큼은 전에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실컷 해보기를 권했다. 꼭 혼자서, 가까이로라도 여행을 떠나서 낯선 것을 즐기는 법을 익히라고 말해주었다. 이미 한번 직업을 바꿔본 K언니는 내게 새로운 일이 전의 일보다 훨씬 큰 기쁨을 줄 수도 있다고, 직업 바꾸는 일쯤은 별 것도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또 한국에서 펼쳐질 새로운 날들이 생각보다 수월할 거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 말들이 내 등을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K언니 역시 내 이야기 덕분에 한동안 울적했던 기분이 가벼워졌다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완전한 타인인 채로 서로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쩌면 완전한 타인이었기에 그럴 수 있었을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우연히 만난 도시의 두 이방인이 서로를 향해 벽을 허물어낸 그 저녁 시간이 수년 전 본 영화보다도 더욱 영화 같았다. K언니와 내가 각자의 무대 위에서 삶이라는 춤을 만끽하는 내내 뜨겁고 찬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밤길을 걸었다.  


비 그친 키미니토가 반짝반짝 오색빛으로 빛났다. 20170724,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소소한 여행 팁

1. 아르헨티나 우편 요금 정말 비싸다. 엽서 한 장 보내는데 2만 원 안팎이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세 장 부쳐야 하는데 두 장 밖에 못 부쳤다.

2. 라보카 지구는 택시 타고 가도록 하자. 대중교통 타고 가는 만용을 부렸는데 가는 길이 정말 험난하고 무서웠다.

3. 콜론 극장은 투어보다도 공연을 보면서 구경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미리 알아보기만 하면 간단한 클래식 공연 티켓은 비싸지 않은 가격에도 구할 수 있다고 들었다.

4. 탱고보다도 '푸에르자 부르타(Fuerza Bruta)'를 반드시 보라는 선배 여행자들의 충고가 있었다. 아쉽게도 일요일엔 공연을 하지 않는 바람에 나는 일정이 맞지 않았다. 요즘 한국에서도 공연을 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현지 원작 특유의 맛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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