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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크루 Aug 11. 2021

두 시간 반의 멜버른 여행

크루즈 승무원의 일상 <기항지 편 ep. 2>


대부분의 크루즈 승무원들이 승선을 위한 짐을 챙길 때에 꼭 챙기는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엄청난 양의 영화나 드라마를 저장한 USB 플래시 드라이브이다.


하지만 나는 챙기지 않는다. 선사마다 다르지만, 우리 배에는 크루 전용 영화 채널이 따로 있는 데다가 승객 전용 채널도 볼 수 있다. 게다가 주변에 물어보기만 하면 수십 개 수백 개의 영화나 드라마를 저장한 USB를 빌릴 수 있다. 그러니 굳이 나까지 번거롭게 다운로드해서 가져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시 뭔가 새로운 영화가 보고 싶어 친구에게 USB를 빌렸었다. 뭘 볼까 훑어보다가 들어보지 못했던 제목을 클릭했다.


1950년대 미국 뉴욕의 놀이공원 코니 아일랜드에서 느껴지는, 빈티지하면서도 비비드한 색감에 끌려 영화를 보게 되었다. 분위기 있는 로맨스 드라마인 줄만 알았던 영화는, 하나의 가족과    명의 인물을 통해 지극히도 비관적인 세계관을 표현한 영화였다. 영화  주인공들은 부정하고 싶은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각자의 욕망을 쫓아갔고,  안에서 희망을 품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바뀐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힘든 현실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낮은 곳에서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만 어느새 다시 있었던 곳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는, 그런 관람차처럼 말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라는, 꽤나 개운치 않은 결말이었다. 바로 감독 우디 앨런, 그리고 주연 케이트 윈슬렛의 영화, 원더 힐 (Wonder Wheel, 2017) 이었다.



영화 원더 힐의 장면, 그리고 포스터



이 영화를 본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던 2020년 1월 12일, 호주 멜버른에 정박한 날이었다.


그날은 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외출하지 않고 배에서 쉬려고 했었다. 오전 근무 시간이 끝나갈 무렵, 바쁘지 않은 틈을 타서 평소의 습관처럼 구글맵으로 항구 근처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전에는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어떤 이름이 내 눈에 딱 꽂혔다.


루나 파크 (Luna Park)


해변가에 있는 공원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클릭했고, 그 순간 놀이공원의 입구 사진이 나왔다. 알록달록한 색감이 뭔가 촌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것이, 난 바로 영화 속의 코니 아일랜드가 떠올랐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자세히 알아보자 싶어 검색을 했고, 무려 1912년에 개장하여 100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놀이공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반드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맵 화면, 루나 파크 홈페이지에 있는 건축 당시 사진, 그리고 1912년 개장 당시 사진



새롭고 세련된 장소의 매력도 좋지만, 나는 오래되고 전통 있는 장소의 매력에서 더 특별함을 느낀다. 내가 큐나드 (CUNARD) 선사의 크루즈 승무원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첫 번째 이유가, 1840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항해를 이어오고 있는 그 역사와 전통에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100년도 넘게 운영되고 있는 그 루나 파크가 너무 구경해보고 싶었고, 3시간밖에 안 되는 쉬는 시간을 100% 활용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초스피드로 외출 준비를 하고 갱웨이로 나섰다. 멜버른 스테이션 피어 항구의 좋은 점 중 하나는 택시 탑승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항구 건물을 나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타고 스테이션 킬다 피어 (St. Kilda Pier) 로 가달라고 했다.


킬다 피어가 보이는 스테이션 킬다 비치 (St. Kilda Beach) 의 어딘가쯤에 내려서 해변가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바다 위에 있으면서도, 해변가를 걷는 그 자체에서 또 다른 매력을 느끼고 힐링을 받는다. 동네를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 속에서 마치 나도 현지인이 된마냥 부족한 시간 중에 나름의 여유를 부려보며 걸었다.


물론 현지인은 셀카봉을 들고 다니며 산책하는 모습을 찍지는 않겠지만 말이다..ㅎㅎ



다리의 왼쪽 끝에 보이는게 스테이션 킬다 피어, 그리고 여유로운척하며 셀카봉으로 찍은 인증사진



걷다 보니 시커먼 동물 형상을 한 동상들도 있었다. 해변가 레스토랑 (Republica St Kilda Beach) 의 입구이자 장식이었다. 해변가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다 보니 뭔가 한없이 부럽기도 했다.



사람보다 훨씬 큰 동상들, 그리고 밖에서 바라본 레스토랑 분위기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해변가 길은 끝이 났고, 아쉽게도 아스팔트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더 앞쪽에는 사람들이 파란 텐트들 주변에 몰려있었다. 20~30대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주최한 프리마켓이었다. 각종 공예품이나 옷, 그림들이 있어서 기념품으로 할만한 것들도 많아 보였지만, 나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기에 주요 목적지를 향해 전진했다.


그래도 잠시나마 로컬 프리마켓을 구경할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며 아쉬움을 달래 보려고 할 때쯤.. 그럴 새도 없이 내 눈앞에는 구글맵에서 본 루나 파크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대로 빈티지하고 비비드한 색감이었고, 생각했던 거보다 더 크고 못생긴 얼굴이었다.



당시 프리마켓 모습, 그리고 길 건너에 보이는 컬러풀하고 못생긴 얼굴의 루나 파크 입구



입구에서 또 한 번 셀카봉으로 인증사진을 찍고, 서둘러 입장권을 사서 들어갔다.


들어가는 순간, 영화 원더 힐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 영화의 등장인물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들처럼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영화 속에 들어간 듯한 그 느낌만큼은 꽤나 기분 좋고 만족스러웠다.



또한번 여유로운척하며 셀카봉으로 인증사진, 그리고 못생긴 얼굴의 루나 파크 입구



나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기에 놀이기구를 타기는커녕 빠른 걸음으로 구경하며 사진만 찍었다. 미국이랑 일본에서 가봤던 디즈니랜드와 비교하자면 턱없이 작은 규모의 놀이공원이었지만, 나름의 넘치는 매력이 있는 공간이었다.


초고속 구경을 끝내고 마지막 목적지를 위해 출구로 향했다.



입구를 비롯해서 모든 공간이 빈티지한 느낌과 비비드한 색감으로 가득했던 루나 파크



출구 쪽에는 아주 키가 크고 다리가 긴 연주가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클라리넷을 부는 콧수염 아저씨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사진을 찍어 보내서는 우스갯소리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빠는 면도를 안 하면 이마, 눈, 코 부분을 빼고 다 수염이 있어서 털보 아저씨라고 불릴 정도였다. 콧수염 아저씨와 털보 아저씨는 물론 다소 다르지만, 그래도 뭔가 그 콧수염 아저씨랑 사진을 찍고 싶었다.


셀카봉을 요리조리 돌려봤지만 아무리 해봐도 콧수염 아저씨랑 내가 같이 나오도록 찍을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인증사진을 남겼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긴 연주가들, 그리고 콧수염 아저씨와 나


 

콧수염 아저씨와의 사진을 끝으로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마지막 목적지는 루나 파크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로컬 레스토랑인 레오 스파게티 바 (Leo's Spaghetti Bar) 였다. 큐나드나 루나 파크보다는 훨씬 젊지만, 이곳도 나름 꽤나 나이 먹은 곳이었다. 1956년에 개업한 후 그들만의 스파게티와 피자의 맛을 쭈욱 이어온 나름 전통있는 동네 밥집이다. 나는 피자와 맥주 한 병을 주문했고, 빠르게 흡입한 후에 다시 택시를 타고 배로 돌아갔다.


앞뒤 외출 준비와 출근 준비 시간을 빼면 2시간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다. 짧고도 정말 알차게 꽉 채운 멜버른 쇼어 리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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