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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크루 Jul 29. 2020

마지막까지 드라마 “믿을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다”

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130~131일 차>


130일 - 7월 23일


이제 사우샘프턴까지 24시간도 안 남았다.


시드니에서 갈 곳을 잃은 후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쫓겨나

필리핀에서 머물다가

잠시 싱가포르를 들렀다가

아라비안해와 홍해, 수에즈 운하, 지중해를 거쳐

고향인 영국에 도착하기까지 24시간도 안 남았다.


크루즈선 내비게이션 어플로 보니

역시 유럽이라 크루즈가 많았다.


오션 크루즈와 리버 크루즈를 다 합치니 정말 많다.


언제 다들 강으로 바다로 다시 나갈 수 있을지.



이제 진짜 마지막 마무리를 해야 한다.


내가 오프닝 멤버로 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지금까지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멤버가

올 수도 있는 상황을 대비해

인수인계 노트를 만들었다.


언제가 될지 도통 모르겠는 정상 운영이

재개된다고 했을 때에


큐나드 중 이 배로 다시 돌아올지

큐나드가 아닌 다른 배를 타게 될지

아니면 아예 배를 타기는 할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획했었던 객실에 관한 공유 자료는

시간 대비해서 정보 공유 차원으로만 정리했다.


업무 상의 모든 마무리는 끝났다.



이제는 태풍 맞은 내 방이다.


크고 작은 수트 케이스 2개에 차곡차곡 담았다.


짐을 다 싸놓고 나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언제 다시 이렇게 크루즈 발코니 객실을

공짜로 내 방처럼 마음껏 누릴 일이 있을까.


다음에는 엄마와 동생, 친구와 함께

크루즈 여행으로서 누리고 싶다.



업무도 짐 정리도 마무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남은 우리 팀 멤버와 함께

샴페인과 와인을 열었다.


이 중 4명은 이미 컨트랙을 마친 상태로

사우스아프리칸 2명은 비행기가 없어 못 가지만

네덜란더와 라트비안은 나와 같은 날 25일에

하선해서 드디어 집에 가게 된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다시금 드는 생각.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언제 다시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언제 다시 서로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1년 12개월 중

평균 8개월은 배에서 일하고 생활한다.


8개월을 모국에 있는 가족 없이 지내는 대신

배에 있는 뱃가족과 지내는 것이다.


언제 다시 뱃가족을

제2의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131일 - 7월 24일


드디어, 진짜로 사우샘프턴에 도착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크루 본국 송환 작업으로 인해 고생을 하다 보니

어디를 간다 갈 것이다 라고 들을 때

모두가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갈 때까지 간 것이 아니다.


회사나 리더가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그만큼 변수가 많았기 때문에

수많은 계획과 취소와 변경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일어나자마나 커튼을 열었다.


정말로 도착했다.





하선하기 전 마지막 날이다.


오후 4시경이었다.


최후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 오피스에 있었고

모든 것을 마친 상태였다.


저녁 시간에 마지막 팀 사진을 찍기로 했고

그 참에 기다리면서 항공편 체크인을 하려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공항이 붐비지 않아

온라인 체크인이 필요할 것 같진 않았지만

만일을 위해 항상 이용하는 어플로 들어갔다.


일주일 전 항공편 예약 번호를 받았을 때에는

브리티시 에어웨이의

런던 히스로 - 파리 샤를 드 골 항공편과

대한항공의 파리 샤를 드 골 - 인천 항공편이었다.


두 항공편의 예약 확인란은 모두 컨펌이었다.


하지만 브리티시 에어웨이의 첫 번째 항공편을

어플로 체크인을 하려는데

공항에서 직접 해야 한다는 메시지만 떴다.


컴퓨터 항공사 웹페이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어서 대한항공의 두 번째 항공편을

어플로 체크인을 하려는데

아예 진행이 되지 않고 페이지 에러 메시지만 떴다.


컴퓨터 항공사 웹페이지에서는

입력한 예약 번호와 개인 정보로는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떴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어플을 재작동해서 다시 로그인을 했다.


여전히 브리티시 에어웨이는

동일한 메시지가 떴고,


더 나를 불안케 한 것은

대한항공 항공편의 예약 확인란에

Unknown으로 뜨는 것이었다.



언논? 알 수 없다고?

아니 왜 몰라? 내일이 비행기 타는 날인데?


이상함을 뛰어넘어 불안했다.


이러다 진짜 안되어있으면

나보고 파리 공항에서 낙동강 오리알 되라고?


크루 서비스 매니저인 마이클에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예약 컴펌인데 무슨 소리냐며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채 자기 일만 했다.


사우샘프턴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항공편 및 비자 등 모든 조치를 선내에서 해왔다.


원래는 영국에 있는 본사가 하는 일이지만

우리는 마닐라에 있었다 보니

현 상황에 대해서 보다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우리가 직접 한 것이다.


하지만 사우샘프턴으로 향하면서

원래대로 본사에서 항공편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도

문제가 있으면 본사에 연락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항상 절차가 있는 법.


선내에 있는 이상

크루 서비스 매니저를 통해야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상황을 이야기했다.


마이클은 굉장히 비협조적이었고

다시 그냥 해보라며 네가 잘못 누른 거라며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항공사의 24시간 연락처를 검색했다.


영업시간이 아니라며 자동응답기로 넘어가서

제대로 확인하기 쉽지 않았다.


4번째 다른 번호로 시도한 결과

겨우 상담원 연결이 되었고

상황 설명을 한 뒤 조회를 부탁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놀랄 노 자다.


예약된 항공편이 없다는 것이었다.


브리티시 에어웨이는 예약해놓고 결제를 안 했고

대항항공은 예약도 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이런 실수를 해놓고 아무도 몰랐을 수 있다 싶어

몇 번씩이나 되물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내렸을 수도 있다.


내렸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는 생각에

온몸이 오싹했다.


마침 대빵 보스가 들어왔다.


이때다 싶어

내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던 마이클을 내버려두고

대빵 닐에게 얘기했다.


몇 번씩이나 얘기했는데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내가 본사에 전화하겠다고 했다.


닐은 마이클에게 당장 전화하라고 했고

수 차례의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원래 예약과는 다른 카타르 항공편을 예약했다.


나는 예약 번호로 체크인을 시도했고,

영국 비자에 관한 정보도 수정했다.


나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오싹거리는

3시간의 드라마를 치른 후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이런 실수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마이클의 말을 믿었을 수도 있다.


시스템 에러겠지 라고 쉽게 넘겼을 수도 있다.


매니저 귀찮게 하기 눈치 보이니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일이 아닌 건 그럴 일이 아닌 것이다.


정말 끝까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확실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기를 잘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공항에서 고생했거나

다시 배로 돌아왔거나

하선한 이상 호텔로 보내졌을 것이다.


정말 끝까지 모를 일이다.


3시간의 드라마가 끝난 후

우리는 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나머지 팀 멤버와 수백 명의 크루를 보내고

마지막까지 남은 우리 팀이다.


마지막 가족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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