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126~128일 차>
126일 차 - 7월 19일
배에서 내리는 날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일주일도 안 남았다.
이번 컨트랙을 위해 배를 탄지는 10개월,
육지를 밟지 못하고 배에만 있은지 4개월이 넘었다.
배 안에 있는 153명만이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고
길이 300미터에 14층 건물 크기 정도의 선내만이
내가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고
업무 외에는 운동, 선상 TV의 뉴스와 영화 채널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비슷한 메뉴와 비슷한 맛의 한정된 메뉴만이
내가 먹을 수 있는 삼시 세 끼이고
이렇게 모든 것이 한정되어
그것에 익숙해지고 당연해진지
이미 4개월이 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익숙한 나의 現세상에서 떠나서
바깥세상으로 나간다니
너무 반가우면서도 모든 것이 낯설 것 같고
모르는 것,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바깥세상은 과연 안전할까?
크루즈는 타격이란 단어로만은 묘사가 안될 정도로
모든 면에 있어서 크나큰 악영향을 받고 있다.
하지만 안전에 있어서는
세계 제일로 완벽하고 바이러스 프리한 곳이다.
적어도 내가 탄 퀸 엘리자베스는 그렇다.
바깥세상은 어떤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까.
선상 TV 채널의 BBC나 CNN 월드 뉴스로만 본
바깥세상이 내가 아는 전부이다.
직접 보고 겪은 것은 하나도 없단 뜻이다.
심지어 한국에 관한 뉴스는 거의 없기 때문에
정말 아는 것이 없다.
이건 반 년 만에 일 년 만에 사람들을 만나서
드라마나 아이돌, 각종 유행 이야기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상황이다.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집에 가기 전에 할 일을 생각하면 바쁘니
걱정보다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든 잘 활용해야 한다.
매일 보던 바다와 하늘도
어떻게든 더 많이 보려고 한다.
평소에는 너무 바쁘거나 미처 여유가 없어
이 기간 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26가지 타입의 객실의 사진을 직접 찍어서
공유할 수 있는 자료로 정리하는 것이다.
신입이든 몇 년 동안 근무했든
객실을 직접 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는 일은
관련된 부서가 아니면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데스크에서 처리할 업무만으로도 바쁘거니와
객실에는 항상 승객이 있거나
체크아웃 직후 같은 승객이 없는 경우에는
내가 시간이 되어도 방이 더럽거나
하우스키핑이 체크인 전 청소를 하느라 바쁘다.
설사 방이 비었고 깨끗하다 해도
객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이러저러한 이유로
평소에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자료로 남겨놓고
모두와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조금씩 벌려 놓았던 일들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자료 정리를 위해 사진을 찍은 후에는
바 관련 재고 확인한 부분을 입력해야 했다.
전날이 마지막 바텐더 볼란티어 날이었다.
집에 가기 전에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저녁에 3시간이나 바를 도와주면
이 와중에 매일 10시간 이상을 일하게 된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
더 이상 도와주지 못하겠다고 한 것이다.
마지막 날에 재고 확인하는 것을 도왔는데
그 수량을 재확인하며 시스템에 입력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정상 운영해서 배에 돌아올 때에
크루 바에서 일해도 무관할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127일 차 - 7월 20일
24일 사우샘프턴에 도착하기 전까지
바쁘게 일하는 크루가 나뿐만은 아니었다.
특히 페인트 작업 크루들이
배의 외부를 부분적으로 다시 칠하느라 바빴다.
배는 바닷바람과 바닷물에 부딪혀
색이 변하고 녹이 슬기 때문에
평소에는 굉장히 자주 페인트 칠을 한다.
아무도 퀸 엘리자베스를 볼 수 없는 바다에 있어서
요즘에는 조금 뜸했었는데
사우샘프턴으로 들어가면
미디어와 Cunarder(큐나드 팬 및 단골)들이
드론이나 카메라로 촬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를 대비해서 특히 바깥에서 보이는 부분들을
다시 칠하는 것이다.
일몰 시간 즈음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지났다.
위로는 유럽, 아래로는 아프리카가 위치하고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좁은 해협이다.
가까우면서도 먼 육지와 구름으로 뒤덮인 산,
그리고 마지막 남은 빛으로 그들을 비추는 해,
나름 볼만한 광경이었다.
가장 폭이 좁은 구간은 14km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 그 구간이 아니었나 싶다.
해가 져가니 등대 근처의 작은 건물들이
불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워낙에 가까이 보였어서
해외 로밍용 심카드가 신호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비행모드를 풀어봤지만
그 어떤 육지의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지브롤터 해협이 끝나가니
작년 10월 경에 갔던
카나리아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가 보였다.
이제는 포르투갈, 스페인, 파리만 지나면
우리의 홈 포트 영국 사우샘프턴이다.
128일 차 - 7월 21일
129일 차 - 7월 22일
사우샘프턴 도착까지 이틀 남았다.
도착하자마자 24, 25일 잇단 하선이니
그에 따르는 준비도 해야 한다.
크루의 하선을 위해서는
선내 전용 계좌도 정리해야 하고
승선 시에 회수한 선원수첩과 여권,
건강검진 진단서, 백신 수첩도 돌려줘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특별하게 선내 닥터로부터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받아야 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간다.
업무도 업무지만
이제는 짐도 싸야 한다.
가지고 갈 짐은 일단 다 끄집어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대충 그림을 그린 후
퍼즐 맞추듯 집어넣는 것이 내 스타일이다.
게다가 마지막 빨래까지 방 안에 걸어놓으니
도대체 방 안에 태풍이 왔다 간듯하다.
내리려면 이틀 남았으니 시간은 충분하다.
그렇게 나는 또 짐을 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