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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크루 Sep 25. 2020

나의 기쁨은 나의 희생

크루즈 승무원의 일상 <기항지 편 ep. 1-1>


어떤 기항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볼까 하며 사진첩을 뒤적거렸다.


가도 가도 또 가고 싶고, 좋아서도 또 가고 싶고, 아쉬워서도 또 가고 싶다. 배 타고 나가 발 디딘 모든 기항지 하나하나가 나를 설레게 했다.


그중 나의 첫픽은 호주 크루즈, 그중에서도


멜버른


지난 주말 SNS에 엄마의 새 보금자리 소식을 올렸는데, 축하한다며 바로 전화해준 친구 정아가 생각나서이다.






크루즈 승무원의 가장 매력적인 특권을 뽑자면, 말할 것 없이 쇼어 리브.


Shore Leave : 본래 해군 및 선원의 상륙 허가라는 뜻으로, 크루즈에서는 승무원들이 쉬는 시간 중 기항지에 외출하는 것을 칭한다.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 시간과 쉬는 시간이 겹치면, 육지 밟으러 뭐라도 구경하러 현지 음식 먹으러 쇼핑하러 무조건 나간다.


쉬는 시간은 부서와 직책에 따라 상이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특별히 긴 쉬는 시간을 신청해서 더 여유 있게 즐길 수도 있다. 단, 하루에 한가할 때는 6.5시간에서 바쁠 때는 14시간까지도 일하는 것을 고려하면, 주어진 시간을 깨알같이 활용해야 한다는 제한은 있다.






이런 굉장한 특권을 유난히도 누리기 힘든 항구가 있는데, 바로 턴어라운드 포트.


Turnaround : 선박 및 항공기가 화물 또는 승객을 내리고 다시 타게 하는 이라는 뜻으로,

Turnaround Port : 즉 항로를 시작하는 첫 항구로서, 기존 승객의 체크아웃을 끝내고, 새로운 승객을 위한 준비를 한 후, 바로 체크인을 시작하는 매우 바쁜 항구이다.


이런 날에는 면세법 등에 의거하여 아예 운영을 할 수 없는 면세점 및 카지노 부서 등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서가 항차 중에 가장 바쁜 날이다.


체크아웃과 체크인 전후가 가장 바쁜 프런트 오피스에게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일하고 싶지 않은 날이자, 일 좀 하는 나 같은(?) 승무원에게는 감정노동의 정점을 맛보는 묘하게도 중독성 있는 날이기도 하다.




2019년 2월 16일, 호바트에서 멜버른을 향해 달리는 바다위에서 바라보는 석양


2019년 2월 17일 아침 6시 22분, 퀸 엘리자베스 갑판에서 포트 멜버른을 바라보며




그렇다 하더라도 항구에 접안하는 날에는 무조건 최대한 길게 나갔다 오고 싶은 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승무원이 바라는 바이다.


2019년 2월 17일, 이날은 특별히 매니저에게 요청하여 긴 쉬는 시간을 받은 날이었다. 친구 정아와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긴 시간 동안 나가서 놀다 오면 되니 땡잡은 날이다???


그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일은 일대로, 쇼어 리브는 쇼어 리브대로, 할거 다 하는 등골 빠지는 날이다.






턴어라운드 포트에서 쇼어 리브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쉬는 시간을 넣으려면 어떤 업무 스케줄을 짜야할까?


멜버른 항구에 입항하는 시간은 07:00 am, 출항하는 시간은 18:00 pm.


바쁜 날이니 10시간 근무로 가정해보자.


06:30 am에 출근해서 체크아웃하는 승객들을 다 응대한 후에, 재정비하면서 다음 항차를 위한 준비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 시간대인 10:30 am에 쉬는 시간이 시작된다.


이렇게 오전 근무 시간은 4시간이다.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방으로 돌아가, 미리 챙겨놓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갱웨이로 날아간다.


Gangway : 배와 육지 사이를 이어놓은 통로라는 뜻으로, 배의 출입구이다.


여기서 혹시라도 체크아웃이 지연되어서 다들 바쁘니까 눈치가 보여 못 나가고 있다거나, 승무원 쇼어 리브가 아직 개시되지 않았다면, 굉장한 절망감을 맛볼 수 있다.


그렇게 내린 육지에서 무엇을 하든 최대한 즐긴다. 쇼어 리브 시간은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니 불평 말고 그저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면 된다.


다시 근무를 시작하는 시간은 16:30 pm.


체크인이 끝나면 출항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승객 비상훈련이 있는데, 출항 시간을 기준으로 한 시간 전인 17:00~17:30 pm에 시작한다. 전 승무원은 훈련 시작 30분 전에는 반드시 승선해있어야 한다. 그러니 최대한 근무 시간을 늦춰봐도 16:30 pm인 것이다.


이렇게 쉬는 시간은 6시간이다.


평균 2000명의 체크인을 정신없이 하다 보면, 크루 메스가 닫는 시간이다.


Crew Mess : 승무원 전용 식당


문 닫기 전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서는, 내 승객이 더 미쳤네 니 승객이 더 웃기네 이러고 수다를 떨며 감정노동으로 쌓인 피로를 떨쳐낸다. 너무 지쳐서 그나마도 못할 때는, 입은 먹는 데에만 집중한다. 수다도 사치다.


이렇게 숨 돌리는 시간은 0.5시간이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서 첫날에 빠질 수 없는 질문 폭탄, 요구 폭탄, 진상 폭탄, 현금 폭탄, 보고서 폭탄을 죄다 맨몸으로 받아내고 나면, 드디어 해방의 시간 23:00 pm.


이렇게 저녁 근무 시간은 6시간이다.






근무 10시간 + 휴식 시간 6.5시간 = 총 16.5시간

+ 전후 출근 및 취침 준비  2시간 = 총 18.5시간


24시간 중 5.5시간 만을 제외한 18.5시간 동안, 나의 심신을 풀가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땡잡은 날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쁨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는 법.


나의 기쁨은 누군가의 희생이라 하던가. 누가 그런 건가. 도대체 누가 왜 그런 건가.


턴어라운드 포트에서의 쇼어 리브는, 부족한 수면과  폭탄 맞이 대잔치 시간에만 일해야 하는 피로를 감내하여야만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기쁨은 나의 희생이다




Port Melbourne, Station Pier에 정박해 있는 퀸 엘리자베스


Station Pier 항구의 하늘에서 보이는 멜버른




다음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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