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하게 되었다.
남자친구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취향이 맞아서 너무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보게 되었다.
처음엔 무섭게 느껴졌던 사람이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고 그 사람과 나의 취향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가는 중이다.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누군가를 더 소중히 여길수 있는 기회를 알게되어 가는 것일까. 내가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마구 가까워지기만 할까봐 두려울 뿐이다. 그를 한 인격체로 존중해줄 수 있게 내가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너의 친한 친구가 찍어준 사진속의 너. 이렇게 아름답게 웃을 수 있구나. 이 사람과 커플이 되기까지 서로 오해하고 속상해하는 시간들 많았는데 그 중에 내가 상처준일도 많았겠지. 학교 식당에서 진지한 얘기를 하면서 내가 차갑게 대하면 상처를 받는다고 했다. 내가 웃는게 좋다고.
나도 내가 웃고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이 좋다.
최근에 파리에서 집을 새로 구하고 있다. 고민하는 하루사이에 집이 나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는 집주인들의 연락에 우울해지기 일쑤였다. 왜 나는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의 이 거만함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 내 뜻대로 되지 않는게 당연하고, 나를 이렇게 한템포 쉬어가게끔 또 내가 조금 겸손해지고 노력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 실패(?)에 감사하려고 한다. 파리에서 집구하기는 프랑스인들도 넌더리 치는 일이니 조금 더 인내심을 갖자. 나는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스트레스에 감정적으로 너무 동요한다.
늘 느긋한 그가 그런 나를 바라볼 때 나는 하릴없이 부끄러워지곤 한다. 나를 바라보는 너의 모습이 변할까봐 두려워지기도 한다. 내가 아닌 척 느긋한척도 해본다.
가여운 것들을 보면서 대부분의 감정은 역겨운 슬픔이였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여자의 삶에 공감이 갔고 그 공감에 내가 가여웠으며 내가 스스로를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했는지도 생각했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누군가와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다. 영화속의 벨라의 자유로움과 천진함에 매료되면서도 벨라의 자유로움을 거부하는 남자들을 보면서 벨라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창조 과정 자체가 모순과 역설에 있듯이 자꾸만 잘못된 선택을 하는 그녀에게 정신차리라고 호통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god이라고 부르는 죽어가는 아버지와 재회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내 안에서 눈물이 멈출 수 없이 흘렀다.
영화관에서 숨죽여 울었고 그가 나를 안아주었다. 무슨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알고 있을 그였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있는 나, 아팠던 부모님의 사연을 알고 있는 나와 벨라와 내가 여자이기에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복합정 감정을 가지고 훌쩍이는 나를 섬세한 그가 모를리 없었다. 나를 다독여주는 그와 영화관을 나섰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은 같이 스시를 먹었고 너와 함께 있으면 파리의 구린 일식당도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내게 다른 세상과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나는 너를 웃게해줄때 뿌듯하고 행복하다. 늘 담담하고 한결같은 너의 미소에 또 한번 반했다. 너가 나에게 웃어줘서 좋다. 너랑 함께 있는데 파리에서 집구하는게 다 무슨 소용이니. 인생은 좋은집이나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