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이 지난 지금에도 수술을 끝낸 엄마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들이 아직도 어제일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 당시에 나는 코로나때문에 병원 밖을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인지 커다란 병원 건물이 감옥처럼 느껴졌고 가족이 암환자라는 사실도 내 손에 수갑을 채운 듯 갑갑했다. 저녁이 되어 엄마가 드라마를 보거나 친구들과 전화통화를 할 때에, 나는 여름 밤 공기를 쐬러 병원의 작은 분수대로 갔다.
무덥고 습한 서울의 여름 밤. 오후의 병원은 병실 곳곳까지 구석구석 내리쬐는 햇살처럼 환자들로 북적이건만, 밤에는 텅 빈 정원에 몇몇의 환자복 잔상들이 흩날릴 뿐이다. 벤치에 앉아 가끔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쐬었다. 친구들과 친척의 연락에 간간히 답을 했고, 병원 밖을 바라보며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잔나비라는 밴드를 이전에는 알지 못했지만 당시에 우연히 유투브에서 노래를 듣고 접했다. 그 당시 병원 밖을 바라보며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이라는 노래를 주구장창 들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간혹 기쁨과 두려움의 눈물을 섞어 흘렸다.
엄마가 수술을 무사히 끝냈다는 기쁨, 프랑스로 가고 싶다는 나의 열망을 여전히 마주함에 대한 두려움. 이제 대장암 수술은 끝냈다. 그러나 유방암이 남아있다. 유방암은 아직 담당의도 만나지 못했기에 또 이 모든 과정을 새로이 해야한다는 막막함.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병원에서의 삶.
일주일이 지나 난 집으로 돌아갔다. 언니가 코로나 테스트를 마치고 엄마의 간병인으로 병원에서 며칠간 보낼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사람들이 다르게 보였다. 건강한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수많은 인생의 가능성을 알까.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축복인가.
집으로 가서는 친구들, 대사관, 프랑스 교육 진흥원, 유학원 등 여러 곳에 전화를 돌리며 나의 경우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참으로 이상하다. 나도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나는 가족이나 나 스스로와 논의하는 대신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했을까.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 엄마와 언니를 만났다. 유학을 가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나는 가족에게 통보를 했다. 서울에 자취방도 알아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뜨거운 가을 햇살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병원 테라스에 내리쬐는 햇살은 눈을 뜰 수도 없을만큼 뜨거웠고 나는 그 보다 온도가 조금 더 높은 눈물을 흘리며 유학을 관두겠다고 말했다. 엄마와 내가 실랑이를 벌였다. 엄마와 언니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유학을 가야한다고 하였으며, 나는 가지 않고 서울에 자취방을 구하겠다고 했다. 이미 집도 보러 갔다고. 실제로 들리진 않았지만 그 때 엄마의 마음이 철렁했던 것 같다.
왜 엄마 탓을 하고 그러니. 네가 아픈 것도 아니고 내가 아픈 거고. 이제 수술도 했고. 프랑스에 가기가 싫으니. 여기에서 너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그렇게 오래 원해왔는데 네 발목 잡기 싫다고.
엄마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