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좀 살만큼 살아봤다고, 익숙해질만큼 익숙해졌다고, 이제 내 인생 내 선택으로 잘 살아보겠다고 일기장에 죽죽 그어놓기가 무섭게 울며 버리던 일기장의 개수가 내 열 손가락의 개수보다 많을 것이다. 나 29살이나 먹었는데 이렇게 쉽게 무너져버리다니.
나이 29에 결정한 프랑스 유학길이었다.
간절히 꿈꿔 실행하기까지 5년정도 걸렸던 것 같다.
어학원 부터 시작할 초보 유학생의 생활, 학생 비자는 교육 진흥원과 프랑스 대사관의 감독 아래 진행중이었다.
엄마의 암 선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아빠의 갑상선에도 무언가 보인다며 병원에서 초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한다고 했다.
고통에 아무말도 하지못한 채 응급실에 누워있는 엄마를 보면서 너무 무서웠다. 엄마의 대장이 터지기 일보직전이라서 코에 호스를 끼워 가스를 빼야했다. 엄마는 너무 아파서 자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2022년에는 아직까지도 코로나로 인해 보호자는 한명밖에 병원에 있을 수 없었다. 재택근무가 가능했던 내가 집에서 노트북만 겨우 가져와 응급실에서 엄마의 곁에 있었다.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는지. 이렇게 아플때까지 왜 아무말도 하지 않았는지 대답없는 엄마를 바라보며 속으로 물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우리는 병실을 배정받았다. 다음날 오후에 의사가 와서, 당장 수술 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배가 터질거라고 저녁에 수술할 거라고 했다. 간호사들이 엄마의 옷을 갈아입히고 나는 엄마의 수술 준비를 도왔고 회사에 연락을 했다.
수술 시간을 기다리며 언니와 아빠는 나와 엄마의 짐들을 가져왔고 엄마는 별 다른 말없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공포의 울음을 몇번씩 터뜨렸다. 나는 친하지 않은 엄마의 형재자매들 그리고 엄마의 친구들 전화를 받아냈다. 그때 깨달았다. 엄마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나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엄마이기 이전에 말이다.
수술 전에 담당의와 간호사들이 몇번씩 병실을 오가며 엄마의 상태를 체크했다. 수술이 시작되고 병실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몇번 울음이 나왔고 수술 예정 종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아마 4,5시간은 더 지나서야 엄마가 병실에 들어섰다. 마취에서 깨어나 정신없는채로, 그러나 계속 아프다면서 울상을 지었다. 너무너무 아프다고 했다. 간호사들은 아픈게 맞다고 엄마를 다독였다. 엄마는 몸을 가눌 수 없었고 나는 너무 무서워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부터 엄마는 오줌통을 끼우고 물조차 먹지 못하며 병원에서 일주일가량 누워서 방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우리만의 병동 모닝 루틴이 시작되었다. 새벽 5시쯤에 간호사가 와서 혈압을 재고 피를 뽑았으며. 오전 7쯤에 나는 엄마의 오줌통을 비웠고 함께 엄마의 엑스레이를 찍으러 갔다. 이 후 나는 병원 지하 1층 카페에 가서 작은 샌드위치와 음료를 먹으며 회사 업무를 시작했다. 엄마는 중간중간에 누워서 나랑 얘기하거나 잠들었다. 나는야 어플리케이션 개발자. 고요한 병동과 어울리지 않는 형형색색의 코드가 컴퓨터 화면에 난무하였다. 회의하다가 중간에 의사선생님 오셨다고 회의를 끊기가 반복되었다.
시간날때마다 병원내에서 산책을 하며 엄마의 장운동을 시켜야 했다. 추가 검사가 있으면 병원건물을 오가며 몸의 이곳저곳을 검사했다. 그렇게 엄마는 방구와의 사투를 시작했고, 엄마의 막내딸은 프랑스 파리 유학을 진지하게 포기하는 생각과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약 일주일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고 엄마는 아직도 방구를 끼지 못했다. 나는 프랑스 교육 진흥원에 메일을 보냈으며 서울에 원룸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