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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Aug 06. 2020

아일랜드 서쪽의 숨겨진 보물 Mayo(1)

코로나를 뚫고 찾아간 숨 막히는 절벽


이른 아침, 우리 네 식구를 태운 렌터카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눈앞의 네모난 창유리는 커다란 화면이 되어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 시작했다.

탁 트인 하늘과 낮은 땅, 그 옆으로 줄지어 지나가는 초록의 나무들을 보니 새삼 반가워 저 밑에서부터 뭔가 울컥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다른 무엇도 필요 없이, 하늘과 나무, 그리고 우리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푸른 바다만 있으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 세 가지는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그 어디에도 똑같은 풍경은 없었다.

길은, 맑은 물과 초록 이파리들을 스치는 햇살, 바람, 비의 손길에 따라 언제나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는 캔버스이자, 앞으로 무엇이 펼쳐질지 그리고 끝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이야기와 같아서 훌쩍 나선 것만으로도 여행은 늘 의미가 있었다.


거의 넉 달만의 탈출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지내면서 차가 없어서 이토록 불편한 적은 없었다. 3월부터 시작된 셧다운 이후 한 달 정도는 집 안에서 거의 숨어있다시피 지냈다. 아일랜드는 주변의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일찍부터 봉쇄령을 내리고 한국의 사례를 주의 깊게 살피며 단계에 맞게 조금씩 상황을 완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덕분에 확진자와 사망자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현저히 낮고 큰 패닉 없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잘 극복해오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곳 역시 초반에는 검사와 결과, 격리와 치료로 이루어지는 일사불란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은 무작정 사람을 접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예방책이었다. 대중교통도 안심할 수 없고, 5km 이내로는 외출도 하지 말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나마 자가용이 있는 집들은 근처에 문을 연 식료품점이나 가까운 들과 산으로 외출이라도 다니며 바람을 쐴 수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집 근처를 빙빙 도는 것이 전부였다.

두 달 후쯤 20km 이내로 외출이 가능해진 후에도 우리에게는 그다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코로나 이전에도 아이들 픽업하러 학교를 오가거나 장을 보러 근처 쇼핑몰에 들르는 것 말고는 거의 집순이나 다름없었던 내게는 평소와 비슷한 일상이었지만, 명료한 숫자들이 나를 제약하고 있다 생각하니 어딘가에 갇힌 듯 더욱 답답증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바다가 그렇게 고팠다. 밤이면 구글맵을 열고 우리 집에서 20km 이내에 있는 바다가 어디일까, 어떻게 하면 가장 안전하게 바다에 다녀올 수 있을까를 상상하다가 잠들곤 했다.


7월이 시작되자 드디어 봉쇄령이 더욱 완화되어 아일랜드 이내의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다녀도 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여름이면 인근의 유럽 국가로 휴가를 다니던 아일랜드 사람들이 죄다 국내 여행지를 찾느라 바쁘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여러모로 우리는 여행이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넉 달 내내 집에서 최악의 홈스쿨링 선생님이자 밥순이로 살았던 나, 논문 막바지 스트레스로 여기저기가 아파 고생하는 남편, 그토록 자기 방만을 사랑하던 사춘기 큰 아이와 한시도 엉덩이를 한 곳에 붙이지 못하는 말괄량이 딸아이까지 모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열망이 극에 달해 있었다. 몇 날 며칠을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닷새의 시간을 만들었고, 겨우겨우 숙소를 찾아 예약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아일랜드의 가장 서쪽에 자리한 'Mayo'라는 곳이었다.

메이요는 아일랜드의 서쪽에 위차한, 더블린의 반대편에 자리한 지역이다.


메이요(Mayo)에 갈 거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두 가지의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거기 그냥 완전 시골이라던데?"

"꽤 아름다운 곳이라고 들었어요."

어쨌거나 대부분 가본 적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내 귀에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지닌 곳이라는 소리로 들렸다. 우리가 메이요를 선택한 것 역시 이곳 사람들에게도 아일랜드의 관광지로 유명한 코크(Cork)나 골웨이(Galway), 링 오브 케리(Ring of Kerry), 슬라이고(Sligo), 도네갈(Donegal), 그리고 북쪽의 벨파스트(Belfast)는 익히 다녀왔지만 메이요는 아직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결정에 더욱 힘과 기대를 실어준 사람은 아이들 학교의 선생님인 앤(Ann)이었다. 우리 가족과 자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던 앤은 20대 후반의 활동적이고 씩씩한, 전형적인 아이리시 여성이다. 예전부터 그녀는 자신이 메이요 출신이라는 것을 자주 언급하곤 했는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떤 곳인지 항상 궁금해서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에는 꼭 한 번 가보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물론 그때는 팬데믹이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때였다.


이번 여행의 계획을 세우면서 제법 마음이 비장했던 이유는 코로나 이후로는 예전처럼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없을 테니, 어쩌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의 마지막 아일랜드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간의 답답함을 힐링받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무엇보다 추억을 더 보태고 싶어서 우리 부부는 앤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신의 고향에 대한 낯선 이방인의 관심만으로도 얼굴이 환해진 앤은 아이들과 함께 가면 좋을 곳, 멋진 경치와 아름다운 해변과 같은 관광지를 비롯해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장소들을 소개해주었다. 풍성한 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4년 넘게 더블린에서 지내면서도 아일랜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수박 겉핥기처럼 관광객 수준으로만 알고 넘겼던 것이 많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일랜드의 가장 서쪽 끝에 자리한 메이요는 매우 아름답지만 오래전부터 척박한 땅이었고, 앤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솔직히 그동안 아일랜드의 외곽지역을 여행하면서 가장 매료되었던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었다. 소위 '관광지'라고 불리는 유명지를 찾아가면서도 정말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인근 어디에도 상업적인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근처에는 작은 펍이나 카페, 그리고 기념품점 하나 정도만 달랑 있을 때가 많았다. 사람들이 꾸미거나 지정해놓은 명소를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거대한 자연 속에 숨겨져 있는 장소를 살짝 엿보고 오는 기분이랄까.

끝없이 펼쳐진 야트막한 산과 너른 들판, 그리고 땅 끝으로 가 닿으면 항상 기다리고 있는 출렁이는 바다. 달리는 차 밖으로 드문 드문 보이는 집들을 보면서 과연 여기에는 누가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이런 풍경 속에서 살면 얼마나 행복하고 여유로울까, 하는 뜬구름 잡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푸른 초원 위에서 자유롭게 풍광을 즐기며 맘껏 풀을 뜯는 소와 양들을 보면서 가끔 남편은 '다음 생에는 아일랜드의 소로 태어나면 어떨까'하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었다.


하지만 메이요에서 태어났고 현재 가족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는 앤의 이야기는 달랐다. 아일랜드 역시 수도인 더블린을 중심으로 교육과 의료를 비롯한 대부분의 산업이 편중된 데다가, 상대적으로 메이요는 다른 지역보다도 개발이 덜 되어서 현지인들은 많은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제대로 된 의료시설도 부족해서 큰 병이 생기면 더블린까지 와야 하고, 현재 우리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Educate Together'와 같은 진보적인 공립학교도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앤 역시도 선생님이 되기 위해 일찍부터 더블린에 와야 했다. 어떤 정치인은 메이요의 사람들에게 건강을 위해 많이 걷고 자전거를 열심히 타라고 독려했는데, 앤의 어머니는 그를 굉장히 싫어한다고 했다. 아직 그곳에는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위험천만한 길이 많은데, 조깅과 사이클링을 즐기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조차 모르고 배부른 소리만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메이요의 서러움은 역사 속에도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150여 년 전 아일랜드의 대기근으로 인구의 25%가 죽어갈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생명을 잃고 다른 나라로 떠나간 곳도 바로 메이요였다. 굽이굽이 슬픈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면서, 안타깝게도 여전히 아일랜드 성장의 그늘 속에서 가려져 빛을 덜 보고 있는 곳. 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곳의 맨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덕분에 이번 여행의 테마는 '여름의 해변과 짙푸른 자연을 만끽하기'와 '대기근의 슬픔이 서린 역사의 길을 따라가기' 이렇게 두 가지의 큰 줄기로 가닥을 잡아갔다.


대서양과 맞닿은 바다와 만날 수 있는 곳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우리 부부는 아일랜드에 와서 한 번도 수영을 해본 적이 없다. 둘 다 수영을 못하기도 하지만 수영을 즐길 만큼 무덥다고 느껴본 때가 없었다. 학교 수업으로 실내 수영장만 종종 다녔던 아이들은 부모를 잘못 만난 탓에 ‘아일랜드의 바다는 그저 바라보며 즐기는 곳, 그 차가운 물속에서 수영을 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계절감각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강요받았다.

신기하게도 이곳에 살면서 가장 먼저 날씨와 환경에 빨리 적응한 것은 아이들이었다. 특히 둘째인 딸아이는 쌀쌀한 4월부터 짧은 반바지에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니느라 온몸이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와 진짜 바다다! 나 수영할 거야!"

메이요의 한 바다에 다다르자 딸아이가 소리쳤다. 정말이니? 나머지 셋은 설마 하는 눈초리로 아이를 바라봤지만 녀석은 진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토록 여름스럽고 휴양지 분위기가 나는 바다는 아일랜드에 살면서 처음 본 것 같았다. 알고 봤더니 그곳은 아일랜드 사람들에게도 멋진 여름 바다로 알려져 있는 킬 해변(Keel beach)이었다. 메이요의 중심에서 서쪽 끝으로 가면 아킬섬(Achill Island)이라는, 자동차로도 갈 수 있는 섬이 나오는데, 그곳의 킴 해변(Keem Beach)과 킬 해변은 멋진 경치와 깨끗한 바다가 어우러진 나름 '유명 해수욕장'이었다.


별다른 정보 없이 어쩌다 이곳까지 달려온 우리는 환하게 반짝이는 모래사장과 탁 트인 바다에 넋을 잃고는 주섬주섬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내가 여벌 옷을 챙겨 온 것을 알고 있는 딸아이는 벌써부터 바다에 뛰어들겠다고 난리였다. 날씨가 어찌나 좋은지 눈부신 햇살 아래로 사람들은 별다른 탈의실도 필요 없다는 듯 모래사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그 틈 사이로 딸아이도 파도를 향해 꺄악 소리를 지르며 내달렸다.

하지만 나머지 우리 셋은 겉에 걸친 재킷조차 벗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여름 분위기에 맞게 반바지를 입고 온 아들 녀석까지 춥다고 난리였다. 보기와 달리 바람이 어찌나 차갑던지 나는 가방 속의 머플러까지 꺼내 목을 꽁꽁 싸맸다. 태양을 제대로 마주하며 파도 사이를 껑충껑충 뛰고 있는 딸아이를 바라보니 마음이 짠했다. 아일랜드에서 지내면서 녀석이 바다에 발을 담그고 수영을 해본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이 새삼 와 닿았다.


메이요를 돌아다니다 보면 아일랜드의 서편 끝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어느 곳을 가도 그저 바다였다. 해수욕장이라는 별다른 표시도 없고, 그 흔한 매점이나 음식점 하나 없이 그냥 모래사장 위에 사람들이 네댓 명씩 자리를 잡고 앉으면 그만이었다. 딸아이를 위해 우리도 차로 한참 길을 달리다가도 두세 번 바다에 멈추어 바다를 즐기곤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그나마 사람들이 많지 않아 한적하고도 아름다운 경치를 내 것처럼 맘껏 누릴 수 있었다.

우리 숙소 근처의 Belmullet Beach에 있었던 바다수영장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절벽, 다운패트릭 헤드(DawnPatrick  Head)

그동안 아일랜드에 여행 온 지인들이 어딜 가야 하냐고 물었을 때, 나의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일단은 골웨이에서 차로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클리프 오브 모허(Cliffs of Moher)에 꼭 가고, 그다음 시간이 되면 벨파스트에 있는 자이언트 코즈웨이(Giant's Causeway)에 가서 멋진 주상절리를 감상해라. 그렇게 멀리까지 갈 여유가 안되면 더블린에서 시내버스나 기차로도 갈 수 있는 호스(Howth)라는 마을에 가서 바다를 보며 하이킹을 즐기라는 것이 정해진 매뉴얼이었다. 셋 다 산, 바다, 절벽을 좋아하는 나의 올드한 취향이 반영되어 있어서 어린 손님들은 "또 바다야? 또 절벽이야?" 하면서 푸념하기도 했지만, 날씨만 좋다면 열의 일곱은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곳이라고 믿어왔다.

클리프 오브 모허
자이언트 코즈웨이
호스

그런데 빠트린 곳이 하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다녀온 '다운패트릭 헤드'는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력적인 장소였다. 다운패트릭 헤드라는 이름은 '세인트 패트릭'이 이곳에 교회를 세운 것에서 유래한다. 세인트 패트릭은 아일랜드에 처음 가톨릭을 전파한 성인으로 유명한데, 아일랜드에서는 그가 사망한 3월 17일을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라는 아일랜드 최대의 명절로 지킬 만큼 여전히 그를 추앙하고 있다.

사진으로만 이곳에 대해 정보를 살짝 얻었던 나는 지금 어딜 가냐는 아이들에게

"바다에 떠 있는 엄청 큰 크레이프 초콜릿 케이크 보러 갈래?" 하며 호기심을 부추겼다.

푸르디푸른 하늘, 그보다 더 짙푸른 쪽빛 바다와 장엄한 파도, 그 사이에 넓게 펼쳐진 초록 들판을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엄청난 절벽과 맞닥트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절벽 너머로 펼쳐진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다운패트릭 헤드의 절정인 'Dun Briste'는 해석하면 부서진 요새(The Broken Fort)라는 뜻이다.

수천 년, 수만 년의 역사가 겹겹이 쌓인 지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초콜릿 케이크' 앞에서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놀라움과 고소공포증에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나마 두려움이 덜 한 내가 조금씩 절벽 끝으로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제발 멈추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절벽으로 향하는 바닥이 스펀지처럼 폭신폭신해서 더 무서웠던 이곳은 지금도 기후에 따라 조금씩 절벽이 변형되는 듯 했다.
세인트 패트릭을 기념하며 세워놓은 기념물


바다 가운데 우뚝 선 조각 절벽은 다운패트릭 헤드에서 가장 환상적인 묘미이기도 한  'Dun Briste'였다. 게일어를 해석하면 부서진 요새(The Broken Fort)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절벽은 1393년에 높은 파도와 격렬한 폭풍우 때문에 해안과 분리되었다고 전해진다. 절벽 틈새로 둥지를 짓고 살아가는 수많은 갈매기들이 바다 위를 유유히 날아다니고, 넓은 들판으로는 양들이 떼 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감상하고 있자니, 알 수 없는 시대와 장소에 머물러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군다나 아일랜드 성인의 영성이 내재된 곳이라 그런지 묘한 신비로움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아 한동안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신이 난 딸내미

하늘과 구름, 바람과 햇살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날씨를 누린 행운에 감사하면서도, 진작 이곳을 알았더라면 그동안 우리 집을 스쳐간 수많은 여행객들에게 꼭 추천해줬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다른 관광지에 비해 덜 알려져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덕분에 숨겨진 보물처럼 소중한 곳을 우리만 살짝 감상하고 온 듯한 짜릿한 쾌감도 있었다.


귀한 보물 하나를 마음에 품고 내려오며 속으로는 다음날부터 이어질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이제는 마음을 가다듬고 1849년, 아일랜드 대기근 속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허덕이던 메이요의 사람들의 서글픈 흔적을 찾아 나설 차례였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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