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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Aug 27. 2020

아일랜드에서 눈물의 '보릿고개'를 찾아가는 길

아일랜드 서쪽의 숨겨진 보물 Mayo(2)

* 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고작 열 살인 딸아이 입에서 구성진 트로트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가사 내용이다.

"너 이 노래를 어디서 배웠어? 보릿고개가 무슨 말인 줄은 알고 부르는 거야?"

"몰라. 그냥 유튜브에서 본 건데?"

더블린에서는 본 적도 없는 한국 트로트 방송을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발견한 아이는 배 한 번 곯아본 적도 없으면서 노래에 제법 슬픔과 한을 담으려 애쓰고 있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나는 그저 가사를 곱씹으며 애달픈 보릿고개의 광경을 상상해본다. 나 역시도 보릿고개를 직접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이참에 아이와 굶주림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았다.


 "우리나라는 오랜 옛날부터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 농작물을 잘 키우고 가을에 추수를 해왔거든. 농사를 지어 거둔 양식을 먹으면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나면 봄이 지날 때는 먹을 것이 거의 다 떨어져서 배고픈 사람이 많았어. 아주 옛날에는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반대로 너무 오지 않아서 농사가 잘 되지 않으면 굶주림이 더 심했고,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그들이 식량을 많이 빼앗아가서 또 힘들었고, 해방이 된 후에는 또 전쟁이 나서 더욱 먹을 것이 없었지."

"그런데 왜 보릿고개야?"

"보리라는 곡식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올 때 즈음에 수확을 해서 먹을 수가 있었는데, 보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동안 너무 배가 고프고 견디기 힘들어서 그때를 보릿고개라고 부른 거야. 그러니까 네가 부른 노래는 매우 슬픈 이야기인 거지."


"그러니까, Great Famine 같은 거구나!"


맞았다. 처음부터 아일랜드 대기근인 'Great Famine' 비유로 설명해주면 쉬웠을 터였다. 아일랜드의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기근' 대해 자세히 배운다. 아일랜드의 굴곡진 역사를 공부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극적인 사건을 절대 지나칠  없다. 지난해 학예회에서는 이것을 주제로  연극을 선보이기도 했으니, 어쩌면 한국의 보릿고개보다  익숙한 내용일 것이다.


대기근의 시작은 아일랜드에 감자 마름병이 돌기 시작했던 18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에게 쌀이 주식이라면 당시 아일랜드인에게는, 특히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는 감자가 주식이었다. 병으로 모두 썩어버린 감자를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자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점점 늘어만 갔다. 당시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은 이런 심각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옥수수와 같은 대체 식량을 들여오기도 했으나 돈은커녕 집도 없도 없는 이들이 옥수수를 사 먹기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아일랜드에서 재배되는 다른 곡물들을 영국으로 가져갔다는 기록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일제시대 때 일본이 우리의 식량을 수탈해갔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결국 5~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당시 800만 명이던 아일랜드의 인구 가운데 200만 명이 굶어 죽거나 살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참상이 벌어졌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훗날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긴 싸움 끝에 1922년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과 비슷한 면적이면서도 현재 아일랜드의 인구가 한국의 10% 정도인 500만 인 이유는 170여 년 전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몇 달 전, 아일랜드의 시인 이반 볼랜드의 부고가 전해졌을 때, 나는 그녀가 남긴 '격리(Quarantine)'라는 시를 읽으며 대기근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이들의 삶과 고통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녀의 시에는 가난 때문에 집을 잃은 남녀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수용하던 구호소(Workhouse)에서 나와 서쪽과 북쪽으로 하염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남자는 병까지 얻은 여인을 업고 고향으로 향하지만 결국 그들이 닿을 수 있는 곳은 차가운 죽음뿐이었다.

*이반 볼랜드의 시와 대기근에 대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이 글을 참고하세요. 



이반 볼랜드의 시를 읽은 후 나와 남편은 시 속의 남녀가 지냈던 'Workhouse'라는 장소와 그들이 희미한 희망을 품고 걸어간 아일랜드 서쪽이 어디일지 무척 궁금했다.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주변의 아이리쉬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더블린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은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때마침 '메이요(Mayo)'가 고향인 학교 선생님 ‘앤’으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여행을 앞둔 우리에게 그녀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여러 장소들을 소개해주었다.

대기근 당시 가장 많은 이들이 죽어간 지역이 바로 서쪽의 메이요 부근이라는 사실과 실제로 그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러 걸어가던 수많은 이들이 쓰러져간 죽음의 길목, 그리고 그 시절에 구호소로 사용하던 건물이 남아있는 장소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대기근의 서글픈 이야기를 품고 있는 뜻깊은 여행지에 다녀올 수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1849년 3월 30일 즈음이라고 전해진다. 대부분의 아일랜드 농민들이 그랬듯, 메이요의 남쪽인 루이스버로(Louisborough) 지역에 살고 있던 농민들도 끔찍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먹을 것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그들은 마을에서 10여 마일 정도 떨어진 델파이 롯지(Delphi Lodge)라는 곳에 가면 식량을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여 600여 명의 사람들은 얇은 옷과 목도리만 겨우 두른 채 신발도 없이 맨발로 걸어갔다. 하지만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따뜻한 음식이 아닌, 차가운 냉대뿐이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가디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점심 식사를 방해하지 말라며 매몰차게 그들 모두를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사진 출처_ ireland-information.com

아일랜드에서 지내온 나는 3월의 추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겨울이 되어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9월부터 4월 말까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때문에 늘 찬 물기를 머금은 으스스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특히나 대서양과 맞닿아있는 아일랜드의 서쪽 지역은 더블린보다 폭풍과 비가 훨씬 잦다. 속이 텅 빈 채로 추위 속에 버려진 농민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감히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집도 음식도, 그리고 더 이상 붙잡을 희망도 없이 내던져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아름다운 산자락 아래로 반짝이는 둘로우 호수(Doolough)를 바라보며 그들은 또다시 길을 따라 걸었을 것이다. 야속하게도 6시도 되지 않아 해는 서서히 지기 시작하고 짙은 어둠 속에서 별빛에 의지하며 얼어붙은 땅에 발을 내딛다가 이내 하나둘씩 지쳐 쓰러져갔다. 다음날 그 길목에서 발견된 것은 그렇게 죽어간 400여 명의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먹을 수 없는 풀들을 입에 문 채 죽은 시체들이 발견되었다고도 전해진다.  

600여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가 쫓겨났던 델파이 롯지의 현재 모습(Delphi Lodge)


환한 여름의 오후, 우리 가족은 'Doolough Pass'를 차로 지나가며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푸른 하늘 아래로 펼쳐진 포근한 산자락과 그 옆에 잔잔히 빛나는 호수, 그림처럼 이어진 그 길목은 화가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무 정보 없이 갔다면 그저 멋진 드라이브 코스라며 감탄하고 지나쳤을 그 길 한 편에서 작은 돌 십자가와 그 주위를 둘러싼 돌무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돌 비석 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었다.

'Doolough Tragedy 1849, Erected to The Memory of Those Who Died in The Famine of 1845-49'

길가에 차를 세운 우리부부와 아이들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무덤 위에 올려놓고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그저 작은 돌멩이 하나가 얹어졌을 뿐인데, 남은 길목을 마저 돌아가는 가슴 한 구석이 전보다 더 무거워져 있었다. 고작 몇 그램일 테지만 살아가면서 결코 잊을 수 없을 질량이었다.


작은 돌 십자가 비문에는 "1845~49 사이에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1988 이후부터 매년 이곳에서 'Famine Walk'라는 특별한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이곳에서 죽은 이들을 기념하고 지금도 여전히 굶주리고 있는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돕기 않기 위해 몸소  길을 따라 걸어보는 것이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먼드 투투 신부와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비롯하여 여러 인사들이 지금까지 이곳을 찾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곳의 비극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아메리카의 인디언인 촉토족(Choctaw)들도 둘로우를 방문하고 아일랜드 기근 구호에 기부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다. 1831년, 백인들에 의해 강제로 땅을 빼앗긴 그들 역시 오클라호마를 향해 500마일을 걸어가다 부족의 4분의 1 이상이 배고픔과 추위, 질병으로 죽어간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방문 이후 아일랜드 사람들도 촉토족들의 '눈물의 행진'에 참여하고 아프리카의 기근을 돕기 위한 기금을 모으는데 동참하였다.

'슬픔이 슬픔을, 눈물이 눈물을, 아픔이 아픔을 안아줄 수 있죠'라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눈물로 맺어진 두 민족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루이스버로에서 델파이 롯지로 걸어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Famine Walk '이벤트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사진 출처_afri.ie)
'체로키' 부족의 화가 America Meredith가 그린  “Choctaw Give Aid to the Irish” (출처 irishamerica.com)'


다음날 아침, 우리의 일정은 앤이 알려준 'Workhouse'가 있었던 장소를 찾는 것이었다. 우리 말로는 '구호소'나 '구빈원'을 의미하는 이곳은 대기근으로 집과 일을 잃은 사람들을 수용하던 장소였다. 먹을 것이 없는 이들이 임대료를 낼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무자비한 지주들과 그들 밑에서 일하는 대리인들은 경찰과 군인을 동원하여 집세가 밀린 농민들을 집에서 마구 쫓아냈는데, 거지와 다름없는 신세가 된 그들이 마지막으로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구호소였다.

그러나 구호소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다 보니 찾아온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나 음식이 턱없이 부족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이들을 일부러 혹사시켜 죽게하는 일이 허다했고, 전염병에 걸려 죽는 아이들이나 여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존 오코너가 쓴 <The Workhouses of Ireland>라는 책 속에는 이반 볼랜드의 시에 등장하는 남녀의 숨겨진 이야기가 담겨 있다. 두 아이와 함께 구호소를 찾은 부부는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 각자의 공간으로 뿔뿔이 헤어지게 된다. 열악한 구호소에서는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병으로 죽는 이들이 늘어났는데, 얼마 후 이들 부부는 불행히도 자신의 아이들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사람들로부터 전해 듣게 된다. 직접 눈으로 보지도 못한 채 아이들과  이별하게 된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괴로움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된 두 사람은 시체들을 모아놓은 구덩이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이미 병에 걸려 제대로 걷지조차 못하는 아내와 함께 아이들의 죽음을 확인한 남자는 그녀를 업고 자신의 가족이 원래 살았던 오두막을 향해 밤새 걸어간다. 하지만 다음날 그들 역시 아이들이 먼저 간 곳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메이요와 슬라이고라는 지역의 경계를 지나가던 우리는 작은 문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커다란 워크하우스의 실루엣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낡은 잿빛의 건물은 여전히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듯 암울하기만 했다.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는 대문 너머로 투박한 돌로 지어진 건물을 이리저리 살피는 사이, 안에서 우리를 발견한 한 여인이 다가왔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그녀는 현재는 빈 곳으로 남은 그 건물을 관리하면서 인근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본 구호소의 전경
대기근 당시 남녀와 두 살 이상의 아이들이 분리되어 생활했던 구호소 내부의 모습 (사진 출처 _ irishcentral.com)


아쉽게도 지금은 사유지여서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워크하우스의 역사를 궁금해하는 이방인을 신기해하던 나오미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는 무척 반가워했다. 그녀는 기근이 지난 이후에는 그 건물이 병원으로도 사용이 된 적이 있고, 한 때는 소년과 소녀들이 공부하는 기숙사 학교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닫힌 대문을 사이에 두고 나오미 모녀와 우리 부부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와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이 지닌 비슷한 아픔을 함께 공유했다. 현재는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있는 우리나라와, 북아일랜드는 영국으로, 남쪽은 아일랜드로 남게 된 그들 나라의 모습이 닮아 있어서인지 서로를 향한 따뜻한 연민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워크하우스를 떠나오면서 문득 이틀 전에 아킬 섬(Achill Island)에서 보았던 버려진 마을의 터가 떠올랐다. 돌로 지어진 137채 정도의 집들이 현재는 앙상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이 마을은 신석기시대부터 형성되었던 제법 큰 집성촌이었다. 하지만 대기근 때 이곳에서 지내던 이들의 대부분이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거나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 결국은 황량한 폐허의 모습으로 남고 말았다. 이렇듯 메이요의 곳곳에는 아일랜드 농민들 겪어야 했던 가혹한 삶의 흔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킬섬에 남은 폐허마을은 대기근을 겪은 섬사람들의 피폐했던 삶을 보여주는 듯 했다.


메이요를 떠나는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 가족은 메이요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블랙소드 기념 정원(Blacksod Memorial Garden)에 들렀다. 블랙소드는 기근으로 죽어가던 메이요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을 품고 찾아온 장소이기도 하다. 지난한 기근은 1880년대 중반까지도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있는 제국이었지만 영국인들 중에는 그들을 돕는 일에 앞장선 훌륭한 사람도 있었다. 제임스 해크 튜크(James Hack Tuke)라는 퀘이커는 3,300명의 이민자들이 블랙 소드에서 배를 타고 보스턴과 퀘벡으로 떠날 수 있도록 돈과 배삯을 지원했다고 전해진다.


블랙소드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꽤 거대한 항구를 상상하며 찾아갔지만 바다로 이어진 길 끝에는 자그마한 부두와 오래된 등대, 그리고 이민자들을 기념하는 조형물들이 놓인 작은 정원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열 척의 배를 타고 대서양으로 나간 이민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해 놓은 이름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140여 년 전 그렇게 아일랜드를 떠난 이민자들의 후손이 어느덧 200만 명이 넘는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민자들이 떠나간 작은 항구와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작은 정원이 마련된 블랙소드


메이요의 크로아 패트릭에는 John Behan이 제작한 'National Famine Memorial'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기근으로 죽거나 배를 타고 떠나간 이들을 표현하였다


긴 시간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풍경은 처음 집을 나설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문득 처음 아일랜드라는 나라에 도착했던 날, 리피강을 지나며 보았던 더블린 시내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낯선 나라가 어떤 슬픔의 역사를 품고 있는지, 그리고 그 아픔을 어떻게 잘 극복해 왔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따뜻하게 우리 가족을 환대해준 아이리쉬들의 여유로운 미소와, 여행을 갈 때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자연의 황홀한 경관들이 그저 원래부터 이곳에 존재했다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알면 알아갈수록 그들의 얼굴 속에서 눈물과 서러움으로 얼룩진 자욱이 보이고 굽이 굽이 산과 물 사이에 품고 있는 굴곡의 이야기들이 드러났다.

그 모든 일들을 딛고 일어선 강인함은 마치 비슷한 아픔을 딛고 성장해온 우리나라와도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아이리쉬들의 노래를 들으면 그들 특유의 한과 정서에 묘하게 공감이 되고,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소탈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더욱 정이 가곤 했다.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궁금해진다. 마치 아일랜드가 고향인것처럼 이곳에서의 일상을 만끽하는 딸아이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우산도 없이 마냥 좋다고 밖을 나서는 아들 녀석이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이곳을 어떻게 기억할까.

아무 생각 없이 보릿고개 노래를 부르던 더블린에서의 평범한 오후와, 굶주림 속에 죽어간 이들을 기리며 둘로우 호수 옆에서 얹었던 작은 돌멩이가 같은 추억의 상자 안에 들어있는 이유를 생각해낼 수 있을까.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풍요로움이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리고 있는 누군가의 고통과 맞닿아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까.

마지막일지도 모를 아일랜드에서의 이번 여행이 아이들의 마음 속에 그렇게 오래오래 살아 숨쉬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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