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져 보기 1
날 만나러 간다.
열정도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다면, 그것도 나를 힘들게 한다. 모든 열정은 곧 사라진 열정이다. 곧 짐이 될 열정이다. 짐의 무게감이 열정의 기쁨을 넘어서는 시점, 나는 그 열정을 떠날 것이다. 그 떠남의 여정도 쉽지 않을 것이다. 괴로움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래도 한때 나의 열정이었으니 말이다. 한없이 조용한 침묵도 사실 별것 없다. 세상 시끄러워 세상에서 멀어져 귀 닫고 입 닫고 얻은 것은 그곳에서나 지혜일 뿐, 그 밖에선 그저 누군가가 만든 고상해 보이는 잡음일 뿐이니 말이다. 아니 잡음도 아니다. 신경 자체를 쓰지 않으니 말이다.
열정으로부터 그리고 한없는 고요로부터 어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부모를 떠난 이는 당연히 집을 떠난다. 여기에서 부모란 굳이 생물학적 부모가 아니라도 좋다. 교사일 수 있고 권력일 수 있고 권위일 수도 있다. 집 역시 살던 물리적 집이 아니라도 좋다. 사회일 수 있고 국가일 수 있고 민족일 수도 있다.
부모가 준 사랑은 종종 부모가 강요하는 관념이 나의 본질이 되는 당연한 이유가 된다. 너를 위해 고생했으니 너는 내가 기대하는 관념, 바로 그것이 되어야 한다. 너는 여전히 미완이고 나만이 너를 조련하여 이끌 주인이다. 그러니 나의 명령을 듣고 나의 관념이 되어 살아라. 이것만 허락한다. 결국 이 독한 말을 곱고 아름다운 말로 강제하면서, 있고자 하는 나를 죽이고 그들의 관념 속 나로 나를 만들어 버린다.
때론 실망하며 한없이 독한 말로 질책하거나 무언의 폭력으로 괴롭힌다. 그 괴롭힘도 사랑이라면서 말이다. 그 학대와 폭력도 널 위한 희생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피해자이며 죄책감에 사로잡힌 무엇을 만들어 버리면 조련이 편하다. 부모, 국가, 민족... 때론 이 모두가 이렇게 괴로움이고 짐이다.
조련된 나는 참된 나를 망각한다. 고생한 부모의 장식품이나 고상한 삶을 산 그들의 보기 좋은 결실이며 보람이 된다. 그럴듯하게 감성적이지만, 결국 나는 나를 잊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진짜 나를 만나지 못하고 부모의 관념 속 내가 되기 위해 애쓴다. 많은 경우 부모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명령이고 괴로움이다. 부모에게 실망을 주는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자책하며 작아진다. 부모를 괴롭힌 존재, 부모의 자유를 앗아간 존재라며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우울은 당연한 모습이다. 자책과 자기부정으로 가득한 그들의 영혼에 ‘우울’이 아니고 다른 무엇이 허락되겠는가.
부모도 연인도 벗도 선생도 가정도 국가도 학교도 직장도 종교도 결국 절망하며 살도록 만들었다.
이제라도 나는 나를 만나려 한다. 나를 안아주려 한다. 이렇게 오래 나로 살았지만 나는 나를 모른다. 나는 나를 만난 적 없이 나로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 눈치를 보는 데 급급했으니 말이다.
나는 이제 ‘아라한(阿羅漢)’이 되려 한다.
모든 욕망과 아집에서 벗어난 해탈(解脫)의 길을 가려한다.
유지승 씀
2023년 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