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후, 첫 미소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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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출가 후, 첫 미소를 만나다.


출가 후, 고타마 싯다르타는 스승을 찾아다녔다. 당연한 일이다. 지난 오랜 깨우침의 여정, 그 여정의 마지막에 있다는 당대의 스승들, 그 철학자들이 가장 깊이 제대로 된 슬기와 앎을 가졌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가 깨우친 바로 그 순간, 그 깨우침은 스승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함으로 얻어진 게 아니라, 그 가르침으로 만들어온 자신을 부수며 일어났다.


싯다르타의 사상이 무엇인지 그의 사상이 내 삶의 답이 되지 않을 거다. 이것은 일종의 단언이다. 그의 사상이 나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을지언정 그의 답이 내 삶을 지배할 순 없다. 나 역시 치열한 내 삶의 돌아봄과 벗어남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깨우침에서 온전히 나의 깨우침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사(哲學史)를 아무리 읽고 이런저런 종교의 교리와 신학에 아무리 능통해도 결국 그 틀 속에 나로 있을 뿐이다. 그 틀이 나의 삶에 맞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말이다.


싯다르타는 순수한 존재가 되어갔다. 순수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어느 하나로 가득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하나 비우는 존재다. 자신을 괴롭힌 누군가를 신이 용서하라니 용서하는 수동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탐욕으로 나를 이룬 그 아집, 그 아집과 온 힘으로 다해 싸우고 싸워 자신을 비우는 거다. 마지막엔 그 비움의 욕심마저 온전히 비우면 줄어든 아집에 애착도 사라지고, 애착이 사라진 자리에, 미움도 의미를 잃게 되는 거다. 자기 스스로 말이다.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을 살면서 말이다.


출가 후 그가 오랜 구도의 삶에서 이룬 건 비우는 삶, 바로 탐욕 가득한 아집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그 벗어남의 여정이 바로 구도자의 삶일 것이다. 그 구도자가 절이나 수도원의 수행자가 아닌 흔하디 흔한 일상의 누군가로 살아간다 해도 말이다.


나는 정원과 텃밭을 가꾼다. 잡초를 모두 죽이고 가꾸지 않는다. 잡초가 나지 않게 비닐로 죽음의 땅을 만들고, 그사이 작은 구멍으로 내가 원하는 식물만 허락하는 그런 정원도 텃밭도 아니다. 잡초도 그 전체의 일원이고, 하루에 한 번 낮시간 쉬어가는 고양이도 그 전체의 일원이며, 심은 꽃과 심은 고추, 토마토, 애호박 등등이 모두 그 전체의 일원이다. 내 욕심을 죽이니 그 정원은 어지러운 곳이 되었다. 그런데 그 어지러움이 그대로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나는 그 정원과 텃밭에 기대가 없다. 그곳에서 많은 무엇인가를 수확할 욕심이 없고 아주 화려한 꽃 천국으로 만들 욕심도 없다. 기대가 없으니 나도 그들을 보면 편하다. 성급한 마음도 없고 실망의 마음도 없다. 그러나 서로에서 우리는 힘이 되고 있다. 굳이 고맙다는 마음이 없어도 그렇게 서로 기대며 서로 다른 여럿은 우리라는 우주가 된다. 아집이 사라진 자리, 나는 절망도 희망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마주하며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다. 그 작은 미소는 보기 좋은 것을 보고 보람찬 미소가 아니라, 있는 그들, 있는 장미, 있는 고추, 있는 토마토, 있는 애호박, 있는 가지, 있는 그곳 모두에 대한 고마움이다. 나 역시도 고맙기는 마찬가지다.


출가, 그 첫걸음은 우리 일상의 작은 것부터 비우는 거다. 내 욕심과 아집 그리고 기대로 나를 비롯한 나와 더불어 있는 모두를 보고 만나는 거다. 그때 나는 출가의 첫 미소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오랜 선생의 가르침, 그 안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 내가 미소 짓는 여기 지금 나의 정답이 있다.


유지승 씀

2023년 6월 22일



도리사 20220923_154302.jpg 구미 도리사에서 2022년 사진 안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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