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고전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대칠 자까 Jun 23. 2023

사도 바오로의 기도

나그 함마디 문서 읽기 1

사도 바오로의 기도     


.... 당신의 빛,

저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소서

저의 구원자시여! 절 구해주소서!

[저는] 당신의 것이기에. 

저는 [당신]으로부터 왔습니다.

당신은 [저의] 마음이십니다.

나를 낳으소서!

당신은 저의 보고(寶庫)이오니

절 위해 열어 주소서.

당신은 저의 충만이오니

절 품어주소서.

당신은 저의 쉼이옵니다. 

저에게 헤아릴 수 없는 온전함을 주소서!     

지금 있고 이미 있던 당신께 

저는 청하오니.

모든 이들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있으신 분, 

주의 주!

영겁(永劫)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망설임 없이 당신의 선물을 저에게 허락하소서, 

사람의 아들을 통해 

성령을 통해 

진리를 옹호하는 이를 통해

저에게 권능을 허락하소서! 당신에게 청하 때.

제 몸을 치유케 하소서! 복음을 전하는 이를 통해 

당신에게 청하 때. 

그리고 나의 깨우친 영원한 영혼과 나의 정신을 구하소서. 

그리고 나의 마음에 은총 가득히 처음 태어난 이를 제 마음에 드러내소서.     

천사의 눈이 보지 못한 것

통치자(archon)의 귀가 듣지 못한 것

그리고 맨 처음 만들어졌을 때 

천사와 

데미우르구스의 꼴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지 않는 것을 

저는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저에게 허락하소서.

당신의 사랑스럽고 선택된 축복의 위엄

처음 태어나 처음 잉태된 이

당신 집의 그 놀라운 신비여!

당신의 것은 권능이고 영광입니다.

그리고 찬양이고 위대함입니다. 

영원히!     

아멘     

사도 바오로의 기도

평화 가운데 

그리스도는 거룩하도다.      


[풀이]      

제법 유명한 이들이 앞다투어 영지주의가 마치 하나의 대안이라는 듯이 들고일어난 이후다. 그러면 그 영지주의란 무엇인지 조금은 차가운 눈으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우리가 무엇인가’이다. 왜 우리는 지금 이렇게 힘든가? 왜 신이 창조했다는 우리는 지금 이렇게 서로 나누어 다투고 있는가? 이 물음에 그저 과거의 설화 같은 이야기로 모든 답이 되지 않자 이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 거다. 지금 들으면 그들의 그 답도 하나의 설화에 지나지 않지만, 그 시대 그들은 당시 헬라스 철학 등 여러 첨단의 철학으로 자신의 그 고민에 답을 만들며 자신들의 신앙을 구성해 갔다.      

미지의 하느님은 신적 배우자인 소피아(슬기로움 혹은 지혜)와 함께 여덟 개로 이루어진 하늘에 거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피아는 남편 없이 자식을 낳는다. 그가 바로 데미우르구스다. 데미우르구스는 다른 여섯 하늘의 통치자를 만들어 낸다. 미지의 하느님과 소피아를 제외한 첫 번째 통치자인 데미우르구스와 여섯 통치자는 물질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였다. 이때 사람은 벌레와 같아서 땅을 기어 다닐 뿐 서서 걷지 못했다. 이에 미지의 하느님은 빛의 세계에서 영혼을 그들의 육체에 보낸다. 이에 그들은 일어나 통치자가 세상을 창조하였음을 깨우치게 된다. 또 자신의 영혼은 그런 통치자의 위에 있는 빛의 나라에 기인함을 알게 된다.      

그러니 데미우르구스와 통치자가 만들고 지배하는 물질계를 넘어서 빛의 세계로 올라가 자신의 영혼, 그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참된 구원이라 여기게 된다. 그 참된 구원의 세상은 플레로마의 세상, 즉 참된 영의 충만함만이 있는 곳이다. 마치 플라톤의 철학에서 이데아계의 존재가 육체란 감옥으로 떨어져 이데아의 세상을 기억하며 그곳을 향하여 살아가야 하듯이 영지주의 역시 육체의 세상, 악을 두고 좋은 것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벗어나 영의 세상, 빛의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 육체의 노예, 감각적 좋음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악을 악이라 여기며 멀어지는 것은 이때 가능하다 그들은 믿었다. 즉 그들은 육체란 조건, 그 조건 속에서 육체적 좋음을 위해 서로 다투는 현실에 자신의 참모습이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곳에 참모습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참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에게 구원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영지’이기도 하다. ‘신성하고 거룩한 앎’ 말이다. 그 영지는 우리를 똑똑하게 하는 ‘지식’이 아니라, 아무리 많은 공부를 해도 얻을 수 없는 ‘지혜’다. 즉 우리를 똑똑하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슬기롭게 하는 거다.      

「사도 바오로의 기도」에서 지금 기도하는 건, 건강도 부유함도 아닌, 건강과 부유함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벗어남이다. 데미우르구스와 통치자의 세상에서 벗어남이다. 그렇게 참된 하느님, 우리에게 영혼을 허락한 그 하느님에게로 다가가 그 품에 안기게 해 달라는 게 지금 이 기도가 바라는 내용이다.     

데미우르구스는 플라톤의 책 『티마이오스』에 등장하는 우주의 제작자다. 영지주의는 플라톤 철학의 데미우르구스를 물질 세상을 창조한 존재로 활용한다. 참아 온전히 선한 신이 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직접 창조하였다고 보지 못한 이유에서다. 데미우르구스는 홀로 이 세상을 모두 다스릴 수 없으니 아르곤, 즉 통치자를 창조한다. 사실 인간 세상을 보면 눈에 보이는 물질 세상의 통치자, 그것이 국가의 통치자이든 종교의 통치자이든 화려한 곳에 올라가 화려한 옷을 입고 특별 대접받는다. 모두를 위해 희생한다는 국가 통치자도 가난의 삶을 강조하는 종교 통치자도 모두 특별 대접받는다. 마치 자기 자신을 통해 국가에 평화가 오고, 마치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종교적 구원이 이루어질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러한 아집도 물질적 소유의 집착과 다르지 않다. 그런 것을 구실로 화려한 곳에서 화려한 지위를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영지주의는 참된 구원은 우리가 사실 이 물질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영적 존재를 자각함으로 시작된다. 국가 통치자나 종교 통치자의 통치를 따름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러니 영지주의는 그런 통치자도 결국은 데미우르구스의 대리인 정도로 봐버리고 그렇게 비유해 버린 게 아닐까. 하여간 통치자를 내세워 데미우르구스는 세상을 다스린다. 그리고 그 세상, 물질적 욕망이 다스리는 바로 그 세상, 종교 역시 말로는 그런 세상과 그런 세상의 욕망에서 벗어났다지만 결국 자신도 그러한 욕망에서 사람의 위계를 나누고 위계 속에서 통치하는 그런 세상, 영지주의는 바로 그런 세상에 관한 벗어남을 시도한다. 그리고 지금 이 기도는 바로 그런 벗어남을 다짐하고 청하는 거다. 


[직접 적은 원문에 각주가 있지만, 이곳엔 각주가 없다. 아쉽다.]


2023년 6월 22일

유지승 옮기고 풀이함



2012년 경주박물관 사진 유대칠


매거진의 이전글 '토마스 복음(도마 복음)' 읽어가기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