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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Dec 17. 2023

나희덕의 '밀랍의 경우' 읽기  

유대칠의 시 읽기 

밀랍의 경우 

나희덕     


밀랍은 더 이상 희지 않고

향기롭지 않으며

손으로 만지거나 두드릴 수 없다     


어떤 불길이 밀랍을 녹여버렸기 때문이다     


밀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아카시아꽃 향기, 벌들의 날갯소리, 햇살과 바람,

누구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도 밀랍은 밀랍일 수 있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밀랍 자체보다

밀랍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이다     


뜨거운 밀랍은

이제 어디로든 흘러내릴 수 있고

어떤 형태로든 반죽될 수 있다     


한 자루의 초가 되거나

한 조각의 비누가 되거나

한 사람의 밀랍인형이 되거나

밀랍은 서서히 굳어가며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그래도 밀랍은 밀랍일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것은

밀랍 자체보다

밀랍이 곧 녹거나 닳아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대칠의 어설픈 주관적 감상문

우리의 생각은 참으로 무섭다. 마치 다 아는 듯 이야기하지만, 우린 드러난 것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 모든 것도 심지어 나 자신도 말이다.      


밀랍을 보자. 밀랍을 이루는 ‘아카시아꽃 향기, 벌들의 날갯소리, 햇살과 바람’은 “누구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들로 밀랍은 밀랍이 되었지만, 우린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다. 우리가 기억하는 밀랍은 “더 이상 희지 않고 향기롭지 않으며 손으로 만지거나 두드릴 수 없”는 무엇이다. 이미 “어떤 불길이 밀랍을 녹여버렸기 때문이다.” “뜨거운 밀랍은 이제 어디로든 흘러내릴 수 있고 어떤 형태로든 반죽될 수 있다.” 밀랍은 어떤 모양으로든 변할 수 있다. 우린 희고 향기로운 밀랍, 벌의 애씀이 녹아든 밀랍이 아니라, 불에 녹여진 뜨거운 밀랍, 이제 우리 마음대로 “한 자루의 초가 되거나, 한 조각의 비누가 되거나, 한 사람의 밀랍인형이 되거나, 밀랍은 서서히 굳어가며 다른 어떤 것이 된” 밀랍은 기억할 뿐이다. 누군가를 위해 태워지고 빛이 되는 밀랍, 누군가를 깨끗하게 하는 밀랍, 누군가의 품에 안길 인형이 된 밀랍, 그렇게 서서히 굳어서 이제 밀랍이 아닌 밀랍의 모양을 기억할 뿐이다. 벌의 애씀으로 향이 녹아든 하얀 밀랍, 그 자체는 기억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을 녹여 우리의 생각대로 만든 무엇을 기억할 뿐이다. 과연 그 밀랍은 밀랍인가? “밀랍은 밀랍일 수 있을까.” 정말 우리가 아는 건 “밀랍 자체보다 밀랍이 곧 녹거나 닳아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밀랍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나의 앞에 누군가 있다. 그 누군가를 이루는 애씀, 눈물 그리고 기쁨 등, 정말 그 누군가를 누군가로 있게 하는 그것을 우린 모른다. 관심도 없다.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저 이 세상 뜨거운 불길이 만들어 녹인 그의 모습을 기억할 뿐이다. 자기를 품어주는 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자리를 기억하는 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그 자리에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자신을 평가하고 점수 주는 이의 시선에 아파하며 그렇게 있을 뿐이다. 어쩌면 자기도 자기를 상실한 채 말이다.      


유대칠 읽고 씀


[부디 나희덕 시인의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 지성사)를 구하셔서 직접 읽어주세요. 각자의 시선엔 각자의 생각이 보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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