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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Dec 25. 2023

황인찬의 '퇴적해안' 읽기

유대칠의 시 읽기

퇴적해안

황인찬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어릴 적 보았던 새하얀 눈밭     


살면서 가장 슬펐던 때는 아끼던 개가 떠나기 전

서로의 눈이 잠시 마주치던 순간     


지루한 장마철, 장화를 처음 신고 웅덩이에 마음껏 발을 

내딛던 날, 그때의 안심되는 흥분감이나     


가족들과 함께 아무것도 아닌 농담에 서로 한참을 웃던 날을

무심코 떠올릴 때 혼자 짓는 미소 같은 것들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런 것들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평범한 주말의 오후

거실 한구석에는 아끼던 개가 엎드려 자기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얘가 왜 여기 있어 그럼 지금까지 다 꿈이야?      


그렇게 물었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개만 엎드려 있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린다     


나는 개에게 밥을 주고 오래도록 개를 쓰다듬었다          


유대칠의 어설픈 주관적 감상문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어릴 적 보았던 새하얀 눈밭”이라 한다. 참 부럽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아주 허름한 판자로 이루어진 집들이 어수선하게 나열된 내 어린 시절의 마을이다.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은 가난의 공간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자리엔 화려한 백화점이 들어섰다. 가난한 마을이라 그런지 의대생이 봉사를 오기도 했고, 어느 자선 단체에선 학용품을 주기도 했다. 마을 교회에선 당시 마을 친구들에겐 쉽지 않은 과자와 과일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흐리다. 그냥 그 일이 기억날 뿐 그 이상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선명히 기억나는 건 별것 아닌 사소한 함께 함이다. 마을 대로변에 있던 중국집, 돈이 없어 함께 먹지 못하고 혼자 자장면을 먹던 기억, 그런 나를 바라보면 부모님의 눈빛, 달고나를 만들어 먹으며 웃었던 그날의 웃음, 친구들과 마을 여기저기 뛰어 달리며 놀던 그날의 기쁨, 한쪽 눈이 의안(義眼)이던 개눈 아저씨네 못난이 인형들, 그리고 아저씨를 그렇게 못되게 부른 이들의 언어로 아저씨를 기억해야만 하는 미안함, 마을 중앙의 작은 가게, 그곳에서 산 콜라가 세상 가장 맛난 음료라고 되는 듯, 한 잔 마시고 신나게 골목을 달리던 그날, 그 콜라 맛, 도둑에게 죽임을 당한 착한 옆집 누나, 나와 종종 놀아주던 교회 다니던 진짜 작은 단칸 판잣집의 누나, 그리고 그 누나와 놀러 다닌 기억, “가족들과 함께 아무것도 아닌 농담에 서로 한참 동안 웃던 날”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무심코 떠올릴 때 혼자 짓는 미소 같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무심코 떠올리면 미안한 이들과 아쉽고 슬픈 일들이 있다. 아무 거창하지 않지만, 이런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 여기 나란 존재가 된 건 분명하다. 그 수많은 인연, 어쩌면 지금 기억도 하지 못하는 소소한 것에서 기억된다고 해도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이, 나를 이루는 조각이란 말이다. 거의 40여 년의 시간이 지나 이젠 사라져 버린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여기 생생히 살아있는 날 이루는 조각이 되어 살아있다. 그렇게 나는 아직도 그 가난한 마을, 그 마을 우물에 빠져 죽은 고양이가 불쌍하다.      


유대칠 읽고 씀     


[부디 황인찬 시인의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문학동네)를 구하셔서 직접 읽어주세요. 각자의 시선이 보는 각자의 생각이 보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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