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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05. 2024

나희덕의 '벽의 반대말' 읽기

유대칠의 시 읽기 

벽의 반대말

나희덕 


벽의 반대말은 해변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해변은 무한히 열려 있는 곳이라고

해변은 어디에나 있다고


그러고는 아스팔트 위에 모래를 퍼나르고 나무를 심고 파라솔을 꽂고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을 데려다 해변을 만들었다 강렬한 태양을 박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완성한 해변에서 사람들은 벽을 잊은 채 누워 있고

파도처럼 어디선가 밀려오고 어디론가 밀려가고

삶이라는 질병에서 잠시 놓여나고


해변에는 벽을 두려워하는 영혼들이 모여들었다

어쩌면 벽을 사랑하는 영혼들이


어머니의 장례식을 끝내고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 열두 시간 동안 실컷 잘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의 은밀한 기쁨이라든가


해변의 발코니에서

소금기 가득한 바람 맞으며

새나 구름, 빗방울을 기다리며 앉아 있을 때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된 어떤 삶**을

알아차리게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 벽의 반대말은

집도 방도 문도 창문도 천장도 바닥도 아니다


차라리 해변에서 들려오는 슬픈 노랫소리나

견딜 수 없는 눈동자 같은 것


더이상 어디로도 가지 않으려 할 때 벽은 문득 사라지니까     


*알베르 카뮈, <이방인>,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15, 45쪽.

**같은 책, 154쪽.     


유대칠의 어설픈 주관적 감상문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는 마지막 영화에서 “벽의 반대말은 해변”이라 했다. 해변은 “무한히 열려 있는 곳”이다. 막힘 없이 먼 수평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의 가능성을 담은 듯하다. 너무 무한히 큰 가능성이라 한 없이 막연하지만, 그 막연함마저 너무나 많은 것이 결정난 이들에겐 평안으로 다가온다. 누구의 자녀이고 어느 대학을 졸업했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 이런 비본질적인 것이 나의 본질이 되어 나를 구속하며 나의 미래와 나의 애씀마저 조롱하며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해라며 비웃는 현실에서 차라리 함 없이 무한한 가능성은 그리움의 대상, 동경의 대상이다. 모든 것이 가로막혀 벽으로 쌓인 이에게 “삶이라는 질병에서 참시 놓여나고”자 어쩌면 해변을 찾아 무한히 먼 수평선을 응시하며 위로를 얻는다.      


그런데 “어쩌면 벽을 사랑하는 영혼들이” 해변에서 위로를 얻고 “삶이라는 질병에서 잠시 놓여나고” 돌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그냥 해변에서 해변이 되어 살 생각은 없는 “벽을 사랑하는 영혼”, 해변은 어쩌면 그런 영혼의 쉼터다. 벽 속에서 살아가며 잠시의 일탈로 찾는 곳 말이다. “어머니의 정례식을 끝내고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 열두 시간 동안 실컷 잘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의 은밀한 기쁨”말이다.       


사실 “해변은 어디에나 있다.” 온전한 자유, 그 무한한 가능성의 자리는 어디에나 있다. “더 이상 어디로도 가지 않으려 할 때 벽은 문득 사라지니까”말이다. 단지 우린 해변을 그리워하며 종종 찾는 그 “은밀한 기쁨”에 안주하며 벽이 되어 살아갈 뿐이다.


유대칠 읽고 씀


[시인 나희덕의 시집 <가능주의자>(문학동네)를 구하셔서 읽어 보셔요. 각자의 눈에 보이는 각자의 생각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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