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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25. 2024

공상(共相): 내 괴로움은 온전히 내 괴로움이다.

유대칠의 낱말

공상(共相)

: 내 괴로움은 온전히 내 괴로움이다.     


나와 온전히 같은 이가 있을까? 나와 온전히 같은 아픔과 기쁨을 가진 이가 있을까? 아픔이 있다고 해도 그 아픔의 이유가 다르고 그 깊이 다를 거다. 온전히 같은 이유로 아프고 같은 깊이로 아픈 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나의 이 아픔과 기쁨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나에게만 있다. 내가 기뻐 웃을 일이 누군가에겐 그냥 지나갈 일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오히려 내가 기뻐할 이 일이 울음의 이유일 수 있다. 그런데 나의 기쁨이 나와 같지 않은 이들을 굳이 미워할 이유는 없다. 원래 우린 저마다의 존재 속에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니 말이다. 아무리 가까운 부모라도 형제라도 말이다. 이걸로 외로워할 필요도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나와 같은 이유로 기뻐하고 슬퍼하길 바라는 마음도 내 욕심이다.    

  

공상(共相)이란 말이 있다. 여러 가지 법(法), 즉 여러 존재는 저마다 다르지만, 공통으로 가지는 특성이 있다. 지금 내 손의 만년필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눈을 들어 책장을 보면 어느 책은 검은 바탕의 표지로 되어 있다. 둘 다 검다. 공통의 특성을 가진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 둘은 서로 다르다. 그 같음은 수많은 우연의 이어짐으로 만들어진 찰나의 현상일 뿐이다. 만년필이 검은 이유와 저 책이 검은 이유, 그리고 검음의 깊이를 따지고 들면, 그리고 얼마나 오래 그 검음이 유지되는가를 살피며 이 둘은 서로 다르다. 이미 저 책 표지의 검음은 오랜 시간을 걸치며 이젠 조금씩 그 검음의 깊이를 잃어가고 있다. 책의 모서리는 살짝 하얀 종이가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편의상 서로를 묶어 ‘검음’이란 하나의 이름을 주고 부르지만,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 두 검음의 차이는 더 선명해질 거다. 처음부터 같지 않은 검음이었기에 말이다. 서로 다른 존재에게 하나의 같음이 주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만든 생각일 뿐이다. 그 생각 밖 존재는 저마다 다른 각자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나의 괴로움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그 괴로움으로 나는 내가 되었다. 그 괴로움을 있게 한 욕심으로 지금 내 아집이 만들어졌고, 그 아집 속에서 나는 나로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내 괴로움에 무관심하거나 크게 슬퍼하지 않는 이에게 실망하지 말자. 서로 다른 존재에게 공통된 본성이 있다는 공상은 사람이 만든 생각일 뿐, 존재하는 건 각자의 아집과 괴로움뿐이다. 저마다 다르다. 그러니 저마다 온전히 서로를 이해하고 알지 못한 채 괴로워할 뿐이다. 그러니 한없이 외롭다. 아무리 나와 같이 보여도 결국 나와 같지 않은 나의 남으로 있으며, 나만이 나의 괴로움으로 아파하니 말이다. 그러나 괴로움에서 벗어나 나고자 한다면, 우리 각자의 욕심을 덜다. 그러면 괴로움이 덜어지고, 그렇게 덜어지면, 나만의 고집과 아집 속에서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그 비워진 자리, 있는 그대로의 누군가를 품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눈물에 손 내미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내 욕심의 빈자리, 나는 누군가에게 안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식에 쉬는 누군가에게서 나는 또 다른 위로를 받을 거다. 내 욕심의 빈자리에서.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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